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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이를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않다. 하물며 일신의 안위가 걸려있을때에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일제에게 강탈당한 조국을 되찾기위하여 구국의 선봉에서 목숨을 들보지 아니하고 의열투쟁한 이곳출신의 위대한 애국선열이 있었으니 바로 박렬의사이다. 박의사는 1902년 2월 12일에 문경군 마성명 오천리에서 부 박지수씨와 모 정선동여사의 3남 1년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함양이고 혹천금당실 입향조이자 조선중종 이조정랑을 역임한 박종린공의 14대손이기도 하다. 이름은 어릴때부터 렬로 불렀으나 호적명은 준식이다. 천성이 강의하고 준영하며 의협심이 강했고 향학열이 높아 7세때부터 서당에 다니면서 함창보통학교를 졸업했고 이어서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경성고보재학중 3.1운동에 가담한 때문에 퇴학을 당했고 바로 고향에 내려와서도 만세시위를 선도한 관계로 일제경찰의 수배를 당하여 이를 피해 1919년 10월에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동경에서는 막노동을 하면서 와세다 메이지대학의 교외생이 되었고 또 어학전문학원인 정칙영어학교에 다니면서 학업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가슴속에 끓어오르는 망국의 통분을 누를길없어 조선인 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