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紀績碑銘幷序(기적비명병서) 나라가 어려우면 나무 아래서 글 읽던 선비가 붓을 던지고 창을 잡아 의를 받들고 적을 토벌하여 위급한 날에 종사를 구하고저 끓는 물, 타는 불속에라도 뛰어들어 그 한몸을 돌보지 않는 이의 수가 하나가 아니로되 穎陽千公이 그 중의 한분이다. 살펴보건데 공의 이름은 보락이요, 자는 선경(善慶)이며 음직으로 참봉을 하였으니 화산군(花山君) 이름 만리(萬里)의 12세손이다. 철종임자(哲宗壬子:1852) 9월 15일에 관음리 집에서 출생하니 자질이 영특하고 센 힘은 사람들을 능가하였다. 을미(乙未:1895)년 운강선생(雲崗先生) 이공(李公) 강년(康秊)이 농암에서 창의를 함에 그 의군에 같이 참가하여 고모산성에서 적을 쳤으나 불리함에 운강옹을 따라 제천으로 가서 의암선생유공의 막하에 선봉장이 되어 새재에서 적을 막다가 몇 달 뒤에 의병이 흩어지고 병신(丙申:1896)에 유옹(柳翁)은 서쪽으로 만주땅에 들어가고 공은 산중에 숨어서 적의 정세를 살피면서 때를 기다렸다. 그 12년 뒤인 정미(丁未:1907)년에 운강선생이 다시 의로운 군사를 제천에서 일으킴에 좌익장이 되어 남쪽을 치고 북쪽을 토벌할 때에 수십차례의 전투에서 베고 얻음이 헤아릴 수 없었으며 패배한 일 또한 많았다. 무신(戊申:1908) 6월에 청풍 백석동에 이르러 운강옹이 탄환을 맞고 잡히어 9월에 경성감옥에서 순국하고 큰아들 승재도 또한 길 위에서 짐살 당하니 철천의 한을 머금고 행장을 꾸려 만주땅으로 건너간 다음해에 나라도 따라서 망했도다. 아아… 슬프구나, 36년만인 을유(乙酉:1945) 7월에 광복이 되고 그 뒤 45년만인 경오(庚午:1990) 8월에 보훈처로부터 선열을 포상하니 건국훈장애국장이 주어졌다. 재종손 한봉(漢鳳)이 일가들과 수의하여 기적비를 고향마을 길위에 세우기로 하고 종증손 기성, 기원이 나를 집으로 찾아와 새길 글을 청하니 정성스러움에 감동하여 늙었다고 거절치 못하고 전후실적을 간략하게 쓰고 이어서 써 새겨 이르나니, 선비의 원기는 인륜과 강상에 독실함이다. 어진 조정이 배양하여 예의 바른 동쪽나라인데 나라 운수가 비색하니 섬 오랑캐가 침략하여 대궐에 들어와 황후를 시해하고 황제를 협박하여 조약을 이루니 산과 물에는 비바람이 치고 피는 팔도를 물들였다. 운강옹과 의지하여 의를 집고 격문을 띠우고 단을 모아 모여서 맹세하니 여러 군사가 춤추며 뛰어올 때 공께서도 그 의려에 참가하여 좌익장이 되어 죽음을 맹서하고 앞으로 몰아 달려 남쪽을 치고 북쪽을 토벌할적에 비는 옷 갓을 적시고 산골짜기에서 이슬 맞으며 잦도다. 외로운 군사는 목숨을 다해 베이고 잡은 것은 많기도 하였다. 운수인 것을 어찌하리 별은 경성감옥에 떨어졌다. 한을 머금고 만주땅에 건너가니 마침내 사옥에 이르렀다. 선열로 포상받아 비를 세워 기적하니 갈평의 양지요 대미산의 기슭이다. 영결한 이름 세상에 남아 있으니 돌은 더불어 갈라지지 못하리라. 출처 : 문경향토역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