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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왜의 밀정들을 농암장에서 포살하는 강개심을 보이더니 융희 정미에 의거의 횃불이 오르자 의병을 소모하여 호좌진을 도아 갈평전에서 승전하고 다시 충북 단양에서 함남안변에 이르는 팔도를 누벼 수천의 의려를 소모하여 대장으로 추대되도다. 보선봉 전세영 좌선봉 강창근 중군 유재칠 참모 엄해윤 영솔조안과 김운선생을 별포삼아 죽음으로 보국코자 맹활약하도다. 수의에 허위 이강년과 모의하고 강계에서 유인석께 군국의 정황을 상문하여 지략으로 토적하였으니 양주전에 적장 장삼랑을 생포하도다. 무신의 영평전에 총상을 입고 피체되니 내란강도율을 씌워 극형이 내렸으나 진민을 송덕하는 비가 선 사실로써 은고를 입어 영평민이 등소 거듭하여 무기에서 10년으로 감형되더니 적괴의 계소를 구실로 임자 섣달에 수여년의 영어에서 풀려나도다. 임술에 상해임정의 천거로 70여 동지를 모아 대한독립후원의용단을 조직하고 경북도단장이 되어 구국광복의 단충으로 군자금을 모으다가 사기현로되어 영옥에서 해포의 고초끝에 갑자에 출옥하였으나 망국의 통한과 옥고의 여독으로 광복전 임신에 향년 69세로 종고하니 성희 경희 이어 묘예번연하도다. 느꺼워 헤아리니 정미9월에 적의 반복으로 생가는 회신(灰燼)하고 빈터만 남아있고 유적은 핍박과 검속끝에 가사2결이 전할 뿐이로다. 광복의 단성을 우회한 창의가는 의려사를 수놓았고, 장토 찬미와 문물제도를 찬양한 답산가는 조국애를 일깨웠으니 참으로 구국독립과 계몽애족사상이 충일한 가조로다. 본도는 이를 문화보재로 지정하고 나라는 그 애국애정을 기려 건국훈장 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