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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식은 경상북도 문경(聞慶) 출신이다. 1902년 내부주사(內部主事) 통훈대부(通訓大夫)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을 역임하였다. 1895년에 거의하여 밀정혐의가 있는 가은면(加恩面)의 김골패(金骨牌)와 상주(尙州)에 사는 강용이(姜龍伊) 등을 농암(籠岩) 장터에서 총살하였다. 1907년 8월 3일 단양(丹陽)에서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하여 도대장(都大將)에 취임하여 울진(蔚珍)·평해(平海)·영양(英陽)·영월(寧越)·산동(山東)·제천(堤川)·원주(原州)·홍천(洪川)·철원(鐵原)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의 휘하 장졸로서는 도선봉(都先鋒)에 김세영(金世榮)·좌선봉(左先鋒)에 강창근(姜昌根)·중군(中軍)에 유제칠(柳齊七)·참모(參謀)에 엄해윤(嚴海潤)·영솔(領率)에 조수안(趙守安)·별포(別砲)에 김운선(金雲先) 등이 있었다. 작전을 전개함에 있어서 이강년(李康秊)의 의진과 합세하여 혁혁한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운강(雲崗) 의진에 합진해서는 소모후군장(召募後軍將)의 소임을 담당하였다. 1907년 9월 1일 신태식이 거의하였음을 알고 일제는 그의 본가에 불을 질러 보복하였다. 1908년 9월 홍주 전투에서 물러나 횡성으로 퇴각할 때 적탄에 맞아 어깨에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주(楊州) 산안(山安) 전투에 참전하여 왜장 장삼랑(長三郞)을 사로잡아 총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2월 14일 영평(永平) 리동(裡洞)전투에서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역부족으로 적에게 사로잡혔다. 1909년 2월 16일 경성 지방 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상고하여 1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이는 영평 면민들이 입비송덕(立碑頌德)한 사실을 들어 진정하였기 때문에 무기형으로 감형되었다가 재차 진정하여 10년형으로 확정된 것이었다. 1918년 1월 19일 경성감옥에서 10년의 옥고를 치르고 출감하였다. 곧이어서 3·1 만세운동이 발발하자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경상도 방면에서 조선 독립 후원 의용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는 운동에 참여하였다. 즉 그는 김찬규(金燦圭)·이응수(李應洙)·김돈희(金敦熙)·김동진(金東鎭) 등 경상북도 지방의 지사들을 규합하여 1920년 가을에 서로군정서와 연락해 가면서 국내에서 독립군 활동에 호응·협조를 목적으로 하는 의용단을 조직하고 김찬규가 경상남도 단장에, 신태식이 경상북도 단장에 선임되었다. 이들은 동지 규합 및 군자금 모금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듬해 겨울에 일본 경찰에 기밀이 탐지되었다. 이로써 대부분의 간부진이 검속되어 큰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지만 지방의 신망 있는 인물들로 조직되었던 이 의용단이 일반 민심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그는 1922년 12월 28일 대구감옥에 수감되었으며 1923년 12월 22일 대구 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았다. 1924년 6월 5일 출옥한 뒤에도 계속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1932년 1월 15일 향년 69세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