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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마을인 가은읍 완장리 마을 안에 순국선열 창주 이승재 선생 묘소 입구라는 비석이 있지만, 어디인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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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재(李承宰)는 경상북도 문경(聞慶) 출신으로 의병장 운강 이강년(雲崗 李康秊)의 장자(長子)이다. 1895년 12월 부친이 을미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참가하여 서상업(徐相業)과 더불어 부친을 보좌하면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 10월 부친 운강과 서상업 그리고 한양이(韓良履)와 함께 재차 거의하여 활약하던 중, 그들의 소식을 접하고 충청북도 배양산(培陽山)의 의진을 방문한 김상태(金尙台)·지판서(池判書) 등의 고무, 격려를 받았다. 1907년 10월에는 김상한(金商翰)과 기타 백여 명을 의병으로 소모하여 김상한을 별진장으로 임명하도록 운강에게 상고(上告)하였다. 11월 피화리 전투에서는 적과 접전하던 중 부상한 동지 이도악(李道岳)을 데리고 절벽을 올라가 무사히 적의 포위망을 벗어난 일도 있었다. 1908년 5월 청풍(淸風城) 전투에서 의진이 적에게 크게 패배하고 그 접전 중에 의병장 운강이 체포되어 경성으로 압송 당하자 아우 긍재(肯宰)와 함께 부친이 유치된 감옥의 문을 부수며 절치부심하다가 체포되었으나 이튿날 풀려나왔다. 9월 19일 운강이 순국하자 의병장 김상태·한양이 등과 흩어진 동지를 규합하여 결사대를 조직하고 계속 활동하였다. 김상태 의병장도 체포되어 순국한 이후에는 원수 갚을 일만을 생각하며 의제(義弟) 한양이(韓良履)와 함께 8도를 두루 다니면서, 결사대를 조직하여 이등(伊藤)을 암살하려고 계획하였으나 발각 당하여 다시 투옥되었다. 그러나 옥중에서 수인(囚人)들의 도움을 받아 탈옥에 성공하였다. 겨우 몸을 피하여 북녘지역으로 피해가서 1년이상을 지냈으나, 나라를 잃고 원수도 갚지 못하는 분함을 참지 못하고 토혈하고 병이 나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