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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민순호 의사의 묘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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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순호 의사는, 경상북도 문경(聞慶) 출신이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일제의 사주에 의하여 발생되었으며, 11월에 일제의 간섭에 의하여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에 전국은 의병운동으로서 일제에 대처하였다. 민순호는 1896년 1월 11일 이강년을 따라 문경에서 거의하고 전재산을 기울여 군자금으로 삼고 의병을 모아 규합하였다. 이어서 일제의 앞잡이였던 안동관찰사(安東觀察使) 김석중(金奭中)·순검 이치윤(李治允)·김인담(金仁覃)을 생포하고 백성들 앞에서 그들의 죄상을 치죄하고 농암시장(籠岩市場)에서 목을 베어 효수하였다. 그 후 마성면 마고성(麻城面 麻姑城)에서 적과 종일토록 교전하다가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였다. 한편 제천(堤川)의진의 안승우(安承禹) 등이 연합 의진을 계획하고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사방의 의병을 불러모으자 이에 호응하여 이강년은 의진을 이끌고 가서 의암의 휘하에서 돌격장에 임명되었다. 민순호는 종사가 되어 서상열(徐相烈) 의진과 합세하여 조령(鳥嶺)에서 적과 접전하였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제천의진의 주요 의병장 대부분이 전사하자 제천 의진은 해산을 강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이강년 의진도 해산되고 단양 산중으로 피신하여 재거할 것을 계획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다시 이강년과 재기의하여 원주(原州)·연풍(延豊)·영주(榮州)·강릉(江陵)·봉화(奉化)·충주(忠州)·안동(安東)·문경 등 14개 면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07년 7월 제천에서 적 5백여 명을 무찌르니 이강년 의진은 충청도·강원도 일대에서 명성을 드날리게 되었다. 그러한 공로로 이강년은 도체찰사(都體察使)의 칙명을 받아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으로 추대되고, 민순호는 후군소모장(後軍召募將)으로 임명되어 각지를 전전하면서 적 수백 명을 살해하였다. 1908년 의병장 이강년이 체포되자 중군장(中軍將) 김상태(金尙台)와 태백산 일대에서 3년여간을 계속 대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일제에 의해 가옥과 가재를 소각 당하는 고통을 감수하고 단양 산중에 은신하여 재기를 꾀하기도 하였다. 한편 '운강선생창의일록(雲岡先生倡義日錄)'을 간행하는 편찬사업에 간여하여 의병의 활동기록을 남기는데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