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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연보 1879년 9월 2일 순흥안씨 안태훈공의 장남으로 황해도 해주부에서 탄생하다. 1884년 6세 조부와 부친을 따라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으로 이사하다. 1894년 16세 '동학을 빙자하여 양민을 괴롭히는 무장 폭도들을 진압하다. 김아령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다. 1895년 17세 천주교에 입교하여 홍석구 신부로부터 영세를 받고 「도마」라는 믿음의 이름을 받고 홍신부와 함께 황해도 지방을 순회 전도하다. 1905년 12월 27세 일본의 불법 침략을 세계 각국에 호소,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청국 상하이」로 여행하다. 귀국, 부친별세, 청계동에서 장례식 엄수. 1906년 3월 28세 청계동을 떠나 진남포로 이사한 후 가산을 기우려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여 구국영재를 양성하다. 1909년 2월 31세 노령 「카리」에서 십이동지와 단지혈맹, 이 피로 태극기에 대한 독립 四자를 쓰고 조국과 민족을 구하기로 하늘과 땅에 맹세하다. 1910년 3월 8일 홍신부로부터 안의사의 「영생영락」을 위하여 「고해성사」와 「미찰성제대례」, 예수님의 「성체성혈」 받아모시는 「대례식」에 감옥소의 일반관리들이 모두와서 참례했다. 여순감옥에서 溝淵 검찰관, 栗原 전옥, 園木 통역, 重村 간수정, 水野, 田鎌 두 변호사 등의 입회하에 정근, 공근 두 아우와 홍신부를 면회하고 동포에게 고하는 최후의 유언을 남기다. 옥중자서전, 유묵 동양평화론 등을 쓰다. 1910년 3월 26일 안의사 의거 후 15일이 되는 3월 26일 상오 10시에 집행되다. 어머님께로 부터 보내온 한복을 갈아입고 여순 감옥 형장에 임하여 「나는 동양평화를 위하여 한 일이니 한 일 양국은 동양평화를 위하여 서로 협력해 주기를 바란다」는 간곡한 부탁을 남기고 순국하시다. 의사의 유해는 보통 사형수와 달리 새 송판으로 침대관을 지어 입관하고 의사께서 몸에 품었던 예수님의 성화를 덮어 여순감옥 수인 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