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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로 향리에서 오적을 성토하셨고 또한 족형 심산 김창숙선생님을 도와서 유림국사건등에도 적지않은 관련을 맺으셨다. 1919년 마침내 거족적인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역관 23세의 몸으로 배상윤 서병준 백성흠 노기학 박경하 김구진등 향리의 동지들을 규합 성주시장의 만세사건을 주도하셨다. 선생은 수 많은 태극기를 손수 만들어 장짐처럼 가장하여 거사일인 4월 2일 성주시장에 운반 이를 군중들에게 나누어주셨다. 수만 시장군중들은 노도같이 만세를 불르니 천지가 진동하는듯 했다. 이때 약3,4천명의 군중들이 행진을 일으켜 일경과 충돌 마침내 경찰서를 포위하여 투석전을 버렸으나 잔학한 일경들의 총칼로 많은 인명피해를 남긴채 거사는 좌절되고 말았다. 선두에서 지휘하던 선생은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으니 상기 6명의 동지들과 함께 7개월의 옥고를 대구형무소에서 치루게 되셨다. 선생은 혹심한 고문에도 또한 감언의 회유책에도 굴하지않고 법정진술에서 용감히 독립의 신념과 항일의 소신을 피력 온 장내를 숙연케 하셨다. 출옥때는 성주읍에서 본댁각지 10리길을 가족에서 보내온 말을 타고 개선장군처럼 귀가하시던차 출영나온 연도민들에게도 무언으로 깊은 독립정신을 일개워주셨으니 분성김씨 종중에서는 일금 삼십원을 거출 약비로 보내에 선생을 가상한바 있다. 후에도 줄곧 선생은 강인한 항일의 지조로서 겨레의 독립을 희구 마침내 해방을 맞이 했으나 일경들의 모진 고문으로 잃어버린 건강을 끝내 회복하지 못한채 1949년 기축 11월 24일 향년 53세로서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는 선생의 높고 거룩한 호국의 얼을 길이 후대에 남기고저 절의의 땅 성주에 이 기념비를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