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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창도와 장서의 기초를 원청하여 쾌약을 얻었다. 한편 백세각에 찾아온 심산 김창숙과 합모하여 전참찬 면우 곽종석을 대표에 추대키로 하여 자광 송규선이 심산과 함께 면우를 방문하여 응약을 받았다. 이렇게 하여 파리장서가 발단되고 회당이 기초한 장서를 명우가 시대의 흐름에 맞게 가감하고 영호의 유림에서 백수십인이 이에 서명하였다. 이 때에 공산과 회천 송필래 획당 송민근이 문중을 대표하여 동참하였고 파리행 경비의 조달에는 회당과 청난 여포회가 거액을 내어 장서를 전달하기에 이르렀다. 성주만세운동은 4월 2일 장날을 거의일로 정하여 백세각에서 태극기를 만들곡 격문을 돌려 군중을 충동하며 기독교인 오임오와 합의하여 일제히 봉기하였다. 관제묘 뒷산에서 백여인이 만세를 외치는 것을 신호로 세한재 송우선 김희규 송천흠등이 주막의 지붕에 올라가 만세를 선창하니 전후좌우에 군중이 호응하여 운동이 절정에 달했다. 이때 군중들이 경찰서 옥상에 올라가 기왓장을 던지며 시위하다가 총탄을 맞고 쓰러지니 피를 본 군중의 운동이 격렬해지고 왜적이 사정없이 총을 난사하여 수명이 죽고 수십명이 상해를 입었으며 6~70명이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이때 송우선 송훈익 송문한이 함께 피체되었고 후일 성재 정재기 연행을 거부하고 자결하였다. 이러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십일간 운동이 산발적으로 계속되니 왜적이 주모자의 검거에 나서면서 공산에게 연행을 청하자 그는 의연히 사생은 명이다 오늘 비록 살아서 갔다가 죽어서 돌아온다 하여도 천지에 부끄러움이 없다하고 따라 나섰으며 왜경의 거사경위에 대한 심문에 나라의 유무가 이 한번의 거의에 달려 있거늘 내 어찌 한번 죽는 것을 아끼겠는가 하였고 이는 정당한 거의라고 주장하니 달부의 감옥으로 보내어 10년의 징역에 처해도 벌이 부족할 것이라고 위협하자 10년이 아니라 종신토록 돌아가지 못한다 해도 내 뜻은 굽히지 못할 것이라 하였으며, 삭발하려하자 내 목은 자를수 있을지언정 내가 죽기전에는 머리카락 하나도 자를 수 없다 하였다. 이러한 협박과 회융도 굴하지 아니하고 회천의 양사왕가회두직이면 이신난사역위영이라 한 옥중시와 같이 모두 신명을 바치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장기간의 옥고를 의연히 겪었다. 이동안 고산 성주 달부로 이동하는 연도에서 배종 일송 인파는 수천명에 달했고 성주와 대구로 문옥한 인사는 254인이며 자의한 성의는 금1385량과 조 1석이었고 광복후 국내의 보훈은 공산을 비롯하여 송천흠해려 송인집 송훈익 자광 송규선 세한제 송우선 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