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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하고 유해의 아버지를 만났으니 효자들의 가슴이 어떠했으랴. 성악은 눈물을 머금고 아버지의 시체를 서울로 모시어 평생에 정이 든 중동학교 교장실에 빈소를 정하고 일헤만에 ..로 모시어 고향으로 발인하여 이곳 성주군 창천동 광봉안산 선영에 어머니 무덤과 함께 모시니 효자들의 한은 하늘에까지 사모쳤다. 선생은 임오 12월 30일 성주군 가천면 영천 최씨댁에 태어나시니 선생의 아버님의 휘짜는 영한이요, 어머님은 완산이씨라..서백가를 다통하니 신동이란 소문이 높았다. 성주 일판은 말할것없고 원근 각지에 명..했다. 소년 15세시에 의성김씨와 결혼하여 3남 6녀를 두셨고 16세때 서울.. 새로운 수학을 전공했고 평양으로 가시어 도산 안창호선생과 대성학교를 이룩하시..서울로 오시어 휘문, 중앙, 보성 각학교에 스승이 되시고 수학연구의 선구 정리사..한편 대한제국 융희3년 5월 중동학교를 창립하시었다. 선생의 향년은 69세이..문은 일찍 작고하고, 차남 성장은 의학박사로 광주김씨와 결혼하여 원곤, 춘곤, 정곤, 대곤,.원곤은 성문에게 출계하고 삼남 성악은 대한민국 외교관으로서 아들 유곤, 경곤을 두고..조촐하고 깨끗한 높은 덕업은 뒤를 이어 푸르고 창창하다. 단군기원 4291년 무술 3월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