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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을의 서편 10여리의 대가면 탕곡은 산세가 빼어나고 들판은 기름지니 이곳이 덕업으로 이름난 수원백씨의 세전 마을이라. 더부러 의열의 지사 우초 백공이 나라의 광복을 찾은지가 갑년이 되어 욱기등과 몇분이 문중의 뜻을 받들어 공의 사적을 각석코저함에 감히 사양할수 업슨 교분이라 공손히 가상과 사료를 두루살펴 서술코저 함이라. 공의 휘는 성흠이요 성은 백씨이며 본관은 수원이니 자는 천약이요 호는 우초이다. 상조는 고려말 정당문학 수원백 휘 천장이요 참봉공 휘 인웅의 15세손이며 예빈사 부정 여재 호 응상의 12세손이다. 고조의 휘는 행수요 증조의 휘는 낙환이며 조의 휘는 남종이고 고의 휘는 문기이니 학문과 행의로서 명망이 높았고 비는 김해김씨니 종지의 따님으로 유순하고 부덕을 가추었더라. 공이 고종 25(1999. 무자)년 10월 17일 탕실마을에서 태어나 어릴적부터 성품이 단아하고 뜻과 행실이 뛰어나며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여 육랑의 회포를 품었고 형제간의 연기가 남다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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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목했고 학문에 깊이 통달했더라. 공은 1910년 한일합방조약이 발표됨에 호국독립의 일념으로 유림을 격려하여 항일운동에 심명을 걸고 활동하며 1913년 사재를 내어 양곡서숙을 개설하고 교육사업에 힘쓰며 한편으로 동지슈합의 회당으로 했고 1919년 3.1독립운동이 발발함에 동지 배상연 서병우등과 적극 참가해서 그해 4월 2일 성주 사장날을 기해 독립만세의 시위에 활약하고 만세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1심에서 징역1년 6월의 형을 받고 항고하여 6월의 형이 언도되니 대구형무소에서 갖은 고문을 당하고 출옥후에 전국의 독립우동가에 격문을 보내는 한편 독립군의 자금조달에 힘쓰다가 옥고의 깊은 여독으로 조국의 광복을 보지못한채 1922년 7월 29일 꽃다운 향년 34세로 한을 남기고 운명했으니 하늘이 무심타 않으리오. 1992년 3.1독립운동의 공적이 확이되어 대통령 표창을 받았더라. 묘소는 탕곡 마을앞 자좌원에 모셨도다. 부인은....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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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2013년 탐방 시 입력한 사적비의 좌측과 후면 비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