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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망국의 소식을 듣자, 문하생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두문불출하였다. 일본 왕의 이름으로 주는 소위 은사금을 거절하자 성주 군수가 호출장을 보냈다. 선생은 호출장 뒤에다 내목은 자를 수 있지만 내 다리는 옮길 수 없다. 라고 적어 보냈다. 1911년 1월 7일 순사들이 다시 데리러 왔는데 선생은 그들 면전에다 화로를 던져 폭력행사죄로 성주경찰서로 잡혀갔다. 둘째 딸의 혼사일을 하루 앞두고 선생은 유연히 그들의 가마에 실려갔다. 떠날 때 그의 부인 박씨는 남편을 격려해 보냈다. 사흘후 대구로 이송되어 검찰로 넘겨졌는데, 미끼라는 일본인 검사는 특히 악질이라 심한 매질을 했다. 이에 선생은 책상위에 있던 벼류를 검사에게 집어던졌다. 그로부터 선생은 일체의 음식을 끊고 단식에 들어갔다. 간수들은 그를 묶어놓고 입에다 숟가락으로 버텅개를 질러 주전자로 우유를 넣었다, 이때 숟가락을 깨물어 이가 빠지고 입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일본 옥리들의 고문은 특히 악랄해서 차마 형언할 수 없었다. 선생의 순절후 염습을 했던 장기옥의 말에 의하면 발굼치가 잘려 나갔고 낭신을 불로 지져서 타고 없었고 어떤 고문에도 굴하지 않자 고문관들이 "이 사람은 사람도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911년 2월 3일 선생은 단식 11일만에 52세로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