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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호는 1905년 을사늑약 직후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시도하였으며, 1919년 파리장서운동(巴里長書運動)을 추진하였다. 김정호는 김노규(金魯奎)ㆍ유안무(柳安茂)ㆍ성태영(成泰英) 등과 논의하여 을사늑약 이후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 마련을 위해 만주와 연해주 일대를 답사하고 돌아와 동지를 규합하는 활동을 하였다. 1919년 2월 고종 황제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로 간 김정호는 3월 1일 김창숙(金昌淑)ㆍ성태영 등 10여 명의 유림들과 함께 탑골공원 독립선언서 낭독 현장에 참여하였다. 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에 유림이 빠진 것을 알고 탄식하며 독립운동에 적극 나설 방안을 강구했다. 이때 김창숙이 파리에서 열리는 국제 평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자고 제안하자, 김정호는 즉석에서 이를 수락하였다. 이들은 곽종석(郭鍾錫)과 전우(田愚)를 유림 대표로 추대하고, 이중업(李中業) 등 상경한 유림들을 모으기로 했다. 1919년 3월 3일에 김정호는 뜻을 같이 하기로 한 유림들과 회합을 갖고 서명자를 규합할 지방 대표 및 담당 지역을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김정호는 경남 지역을 맡기로 하였다. 각자 담당 구역으로 떠나고, 김정호는 김창숙과 함께 동지 규합을 위해 좀 더 체류하다가 경남으로 내려가 활동하던 중 3월 18일 성주 가천(伽川)에서 강도의 피습을 받고 별세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