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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하지 않았으며 소리보다는 대의를 중히여겼다. 생보8세에 중부 성암공에 수학하였다. 1943년 일군 강징되어 중원땅 호북에 잡힌 몸이 되였으니 그 어찌 공의 본의 그러하랴 광복군에 가담하는것이 오매불망 소원이었다. 그러든차 1943년 8월 중순에 동지 홍기화 신덕영과 함께 탈출하여 광복군 제2지대 특파공작대장 김천성과 조국광복을 맹약하고 한미합작 군사훈련 무기반을 수료한후 국내 정진군 황해도반 제2조에 편성되어 구국항쟁에 앞장섰다. 동년 9월에는 무창 남방 장사에서 일군 신병부대를 공격하여 막대한 전과를 올렸다. 10월에는 무한지구에서 11월에는 양자강 도강작전에서 큰 공을 세웠고 이듬해 2월에는 하남성 신양에서 적과 조우하여 대다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 후 군사령부 지휘하 공수특공대에 편입하여 출발 대기중 꿈에도 그리든 조국광복의 날을 맞았다. 오호라 난세에 처하여 시운을 탄하기는 쉬워도 분연히 떨처나서 몸소 대의를 해하기는 진실로 어렵다. 815해방된 이듬해 1946년 6월에 지대장 이범석장군과 상해를 경유 전부대원이 동행귀국하였다. 동년 11월에 또 다시 민족청년단장 철기 이범석장군하 수송부에 임명되어 헌신노력하였으며 1949년말에 고향에 도라와 여생을 보내다. 몰후인 1982년에야 대통령표창이 있었으니 만시지탄이 어찌 없으리요 배는 밀양박씨니 해철의 녀로 슬하에 3남 3녀를 두니 전수 준수 민수요 손에 상훈 상협이있다. 한결같이 행선명민하니 공의 유훈이 여광이다. 오늘 국가유공자 묘역정화사업의 일환으로 국가가 지원하여 구국지사의 묘비를 세움에 있어 장자 전수 종질 용수씨가 찾아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