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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호당 김희규 선생 기념비 경부 성주 출신으로 1919년 4월 2일 성주장날을 기하여 이기정, 송인집 등이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때 기독교계통에서도 이날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확정하고 거사준비를 하고 있던 중 유림계통의 소식을 전해듣고 진보적인 전술로 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 이날 모인 700~800명의 시위군중은 경찰서 앞으로부터 남방군청 앞 및 양쪽 소로에 까지 모였고 시장통에는 약 1,500명의 군중이 몰려들었다. 이 때 시위군중이 독립만세를 고창하자 일경이 해산을 강요하면서 발포하여 계속적인 만세시위가 어렵게 됨에 따라, 시위군중은 산위에 올라가서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일경에 피체되고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언도 받아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8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