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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비웃으며 말씀하기를 『남의 밭을 빼앗은 놈이 도리어 임자를 꾸짖으니 불의(不義)라 해야 마땅하리라.』하였다. 이에 전후사(前後事)를 몹쓸게 추궁하며 기만협박(欺瞞脅迫)의 죄로 다스렸으나, 공은 얼굴에 노기(怒氣)를 띠고 성난 소리로 대항하였으며, 그 기개(氣槪)는 상설(霜雪)처럼 늠름하였다. 서장(署長)은 공을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 법에 따라 하옥(下獄)하였으며, 검판사(檢判事)의 심문(審問)에도 한결같이 전에 하였던 말만을 되풀이하였는데, 마침내 이년의 징역형(徵役刑)이 선고(宣告)되었다. 공은 말씀하기를 『의를 행하고 굴복하는 것은 선비가 부끄러워할 바이다.』하고 죽기를 결심하여 단식(斷食)하였으며, 그들은 여러 번 우유(牛乳)를 입에 적시었으나 공께서는 뿜어서 목에 넘기지 아니하였다가, 마침내 24일만에 돌아가시니, 실은 5월 6일이며, 행정촌(杏亭村) 청룡산(靑龍山) 임좌원(壬坐原)에 장례하였다. 아! 살신성인(殺身成仁)은 진실로 군자가 할 일이다. 그러나 옛 기록을 두루 살펴보면, 소위 성인(成仁)한 자는 모두 왕실(王室)의 지친(至親)이나 원로(元老) 중신(重臣)에 관계되며, 유독 포의(布衣)의 신분으로서 능히 의를 위하여 항쟁(抗爭)하고 목숨을 맡긴 이는 오직 왕촉한 사람뿐이나, 전쟁으로써 위협하지 아니하였다면 반드시 그렇지도 아니하였을 것이다. 지금 공께서 의(義)를 이룸에는 왕실(王室)이나 중신(重臣)의 지위에 있지도 아니하였고 또 무력(武力)이 가해짐도 없었지만 그 마음이 나라를 위함에 있었기 때문이다. 생명과 의를 두고 취하고 버림을 결정해야 할 때, 차라리 생명을 안전하게 하기보다는 의귀(義鬼)의 길을 택하였으며, 원수의 형벌을 받으면서 구차하게 살기를 싫어하여 떳떳이 죽음을 취하고 후회함이 없었으니, 말하자면 천고에 드물게 있을 일이 아니겠는가? 배는 연안차씨진성(延安車氏鎭聲)의 따님이며 한 아들은 재일(在一)이고 딸은 최수곤(崔壽坤)에게 시집갔으며, 손자는 기호(基鎬)와 우호(佑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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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국이 나라를 잃은 지 십년만인 기미(己未 : 1919)년에 온 나라의 지사(志士)들이 맨손으로 일상 오랑캐에게 항언(抗言)하여 독립(獨立)을 찾고자 하였는데, 성주도둔암무환(星州都遯武煥)님 또한 이에 참여(參與)하여 시종 굴(屈)하지 아니하고 마침내 옥중(獄中)에서 아사(餓死)하였으니, 그 의열(義烈)은 가히 길이 사라질 수 없다. 장차 묘비(墓碑)를 세우려고 족하 재인씨(在仁氏)가 종질(從姪) 재철씨께서 지은 행장을 나에게 주면서 그 뜻을 말하였다. 나는 수연(愁然)히 말하기를, 『나도 당시의 항요(巷謠)(거리의 풍설 또는 그런 노래)를 들었는데, 그에 의(依)하면 의사(義士) 둔암(遯巖)은 죽었어도 오히려 살았다고 하였는데, 이제야 과연 죽지 않았음을 기억하겠도다. 나 또한 같은 일을 한 사람으로서, 비록 병이 들어 피폐하지만 어찌 감히 그 정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였다. 살펴보건대, 공은 운재(雲齋)선생 균(勻)의 십삼세손(世孫)으로 이계공(移溪公) 처사(處士) 원상(元相)의 차자(次子)이고 비는 광주이씨이익(廣州李氏以翼)의 따님과 광주이씨찬섭(光州李氏瓚燮)의 따님이다. 고종무자(高宗戊子) 1888년에 공이 출생하셨는데, 천품(天稟)이 비상한 자태(姿態)로 태어났으며, 가정에서는 또 즐겁게 다스리는 어진 분이 있어서 어릴 때부터 법도 있는 훈계(訓戒)를 몸에 익히어 오직 충효(忠孝)만을 생각하였다. 이미 장성(長成)하여서는 나라가 없어진 슬픔을 통감(痛感)하여 항상 침략자를 물리치고 잃은 나라를 다시 세워 바로잡기를 생각하였으나 그 계책이 없었다. 마침내 3·1 운동을 맞이하여서 뛰쳐 나가 말하기를, 「바로 이때다.」하고, 전면민(全面民)을 규합하여 대한독립을 외쳐 부르면서 일제의 관청 앞에서 제 나라로 물러가라고 꾸짖으니, 저들의 기세는 궁지에 몰리어 소침하여졌으며, 일제 관속(官屬)들은 이에 버틸 수 없어 도망하였다. 이튿날 새벽 해뜰 무렵에 이르러 그는 잠자리에 들었다가 체포되어 경찰서(警察署)로 압송되었는데, 소위 서장이란 자가 힐책(詰責)하며 망동(妄動)을 부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