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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홍(裵遇鴻) 이만희 이희철 이기철 등 23인이었다. 뒤에 설립된 대한협회 성주지회의 임원 및 회원도 다수 이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성주지역의 문중과 마을이 대부분 참여하였다. 많은 군중이 참여한 이날 모임에서 전의관(前議官) 이회영은 참여를 독려하는 연설을 하였으며 군수 김흥기(金興基)는 즉석에서 100원을 출연하였다. 전남 광주 출신 행상인 장도선(張道善)도 의연했으며 부인은 물론 기생과 과부 등도 반지와 비녀를 의연하였다. 장석진 김달곤 이기두 등의 열성적인 의연금 모집활동은 충효를 겸비한 인물로 칭송되었으며 상민 김사일(金士一)의 적극적인 의연활동과 현지에 거주하던 일본인 풍산언병위(豊山彦兵衛)와 기생 매선(梅仙)의 의연은 감동 그 자체였다. 이날 의연(義捐)된 금액은 1079원 69전이었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4월 12일 잡보에 게재된 성주군국채보상취지서에서는 국채의 상환에 국가의 존망이 달려있다고 하며 국민의 의무로서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승희는 거듭되는 일제의 탄압으로 1908년 5월 블라디톡으로 망명을 하고 성주군국채보상의무회는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에 의하여 운영되었다. 이후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조직적인 방해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으며 1910년 4월 국채보상금처리회 전국대표 회의에 김창숙이 성주군 대표로 참석하였으나 원만하게 처리되지 못하였다. 이에 김창숙은 성주지회에서 보관하고 있던 국채보상금으로 김원희(金元熙) 도갑모(都甲模) 이항주(李恒柱) 이진석(李晉錫) 배동옥(裵東玉)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