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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 이수택 선생의 자는 덕윤이요 호는 일몽이요 경주를 본관으로 한 문익공 귀암선생 원정의 후손인데 아버지는 연환이요 어머니는 광산김씨로서 1891년 신묘2월 17일 칠곡군 석전리 본가에서 탄샣했었다 나면서부터 용모가 준수하고 기개가 있어 7세에 한문을 배울적에도 충신의사들이 나라를 위해 피를 흘리는 귀절에 이르러서는 매양 감탄하기를 마지못하는 것이었고 또 1910년 20세에 나라 무너지는 날을 만나서는 향리의 동락학원과 서울의 보혜학교등에서 신학문을 배웠으나 그는 문득 학문보다 국권찾는 것이 더 긴급한 일이라하고 분연히 일어나 몸을 독립운동에 던졌었다. 23세에 안자산 황상규등과 함께 밀양 일합사의 동지가 되었고 29세에는 만세운동뒤 이각이라 변명하고 만주로 건너가 김원봉 곽재기등의 의열단에 가담했었다. 2년뒤에 왜정기관폭파의 사명을 띠고 귀국하여 서울 안동 밀양 부산 창원등지로 다니며 의거의 기회를 엿보든중 부산에서 체포되자 벙어리 노릇으로 기이한 꾀를 써서 석방되었다. 그 뒤에 무릇 10년동안 독립단과 연락하여 자금조달에 애쓰든 나머지 또다시 직접행동을 계획하는중 어머님상을 만나 잠시 고향에 돌아왔다가 이어 34년 정월에 체포되어 2년 6개월의 징역판결로 서울대구 감옥에서 동지 이종암등과 함께 복역하고 36세 10월에 출옥하였으나 일찌기 악독한 고문으로 갈비뼈가 부러졌든것 때문에 몸을 못쓰고 입원치료하든중 동지 고인덕의 옥사한 소식을 듣고 병이 더하여 마침내 1927년 정유 6월6일 37세로 세상을 여의었다. 때에 아들 달진은 병으로 누워있었고 고향에서는 사회단체연합장으로 모시고자했으나 왜정의 탄압으로 실행하지 못하고 선생을 쓸쓸히 보낼수밖에 없었지마는 천도 무심치아니하여 가신지18년만에 조국은 광복되고 또 광복된지 20년이 지났을망정 늦게나마 선생의 뜻과 행적을 돌에 새겨 고향땅 많은 사람들 다니는 곳에 기념비를 세우게 되었으니 이 어찌 느꼅지 아니하냐. 겨레의 자유를 위해 조국의 제단에 생명을 바친 투사의 혼이 깃드신 곳 만고에 끊임 없이 흐르는 저 낙동강 물도 목메여 울어 예는 여기 동포여 이 앞에 이르거든 부디 님의 뜻 가슴에 새겨 내 나라 빛낼 것 잊지 마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