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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외의 민족지도자들과 연계하여 대규모 항일 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대한광복회를 조직하고 그 일원으로 활약하며 자금모집과 선전활동을 전개하며 1944년 여운형, 조동호 등과 합세하여 일본의 패망을 예상하며 건국동맹을 결성할 때 중앙조직의 재무담당자로서 자금조달 및 자금관리를 맡아 활약하셨으며 건국동맹의 실무작업도 서울 종로6가 우당의 자택에서 이루어졌고 우당의 서울 자택은 건국동맹의 본부 역할을 하였다. 그러던 중 1938년에 우당의 장남 이두석이 왜관에서 독서회(讀書會)를 결성하여 농촌계몽운동한다는 구실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 경찰서의 혹독한 고문 중에 사망하시니 그의 평생에 이것을 슬퍼하고 애석하게 생각하여 지내셨다. 1945년 8월 초 건국동맹의 존재를 파악한 일경에게 우당의 자택에서 동맹원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출감하여 귀가하실 때 이북으로 향하는 소련 요원들과 함께 나오셔서 서울 종로6가 자택에서 그들의 노독을 풀고 보내셨다. 이로인해 광복 후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셨을 때 좌익이라는 모략을 받고 낙선하셨다. 그 후 1950년에 일어난 6.25 동란 중에 매원 우당의 생가는 전투의 격전지로 변하여서 초토화되었으니 나라의 기구한 운명에 우당은 다시 한 번 수난을 당하셨다. 우당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