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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수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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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당 장석영 선생은, 1919년 4월 2일 성주 장날을 이용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영남지방의 유림으로서 일찍이 1905년(광무 9)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국권침탈조약인 을사5조약이 늑결되자, 이승희(李承熙)·곽종석(郭鍾錫) 등의 유림과 더불어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疎)」를 국왕께 올렸다. 1907년(융희1)이래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지방의 보상회장(報償會長)으로 추대되어 비밀결사가 있을 때마다 대표직을 맡아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1912년에는 해외 독립운동기지와 이주개척지의 한교(韓僑) 동태를 기록한 요좌기행(遼左紀行)을 저술하여 독립운동사의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1919년에는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등과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기로 계획하고 청원문 초안의 작성을 담당하고 여기에 유림대표 137명중 1인으로 서명하였다. 또 고향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이기정(李基定)·성대식(成大湜)·송수근(宋壽根) 등의 유림과 접촉하여 일정을 계획하였다. 이때, 유진성(兪鎭成)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측의 독립운동 계획이 있음을 듣고, 이들과 만나 성주 장날인 4월 2일을 기하여 연합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타협하는데 성공하였다. 드디어 4월 2일 오후 1시경 성주면 경산동(京山洞) 관제묘(關帝廟) 뒷산에 모인 기독교도들이 먼저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으로 몰려오자, 시장에 모여있던 유림들도 호응하여 시위군중의 수가 3천명을 넘었다. 이때 일본 경찰이 주동인물을 연행하여 시위군중의 분노가 고조되자, 겁을 먹은 경찰들이 발포하여 군중은 일단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재집결하여 일본인 가옥을 방화하고 경찰서를 습격하리라는 소문을 들은 일본 경찰은, 일본인들을 경찰서내로 피신시키고 대구로부터 15명의 수비병을 증원받았다. 오후 11시 재집결한 시위군중과 일본 경찰사이의 무력충돌로 1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일본 군경은 대대적인 검거작업을 폈는데, 그도 이때 체포되어 1919년 8월 21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2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