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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강원형선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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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仁明)학교에 입학하여 한말의 유학자 장지필(張志必)의 가르침을 받고 졸업한 그는 1914년 3월 조선보병대에 입대하여 1916년 제대후 곧바로 조국광복투쟁에 나설 것을 결심, 당시 비밀 독립운동 단체였던 광복단에 가입하였다. 1918년 7월, 광복단 동지인 이내성(李乃成)의 소개로 만주 봉천성(滿洲奉天省)에서 김정묵(金正默)과 이국필(李國弼)을 만나 독립운동방략에 관하여 논의하고 러시아 영토인 하바로프스크로 가서 교포 청년 80여명을 모집하여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1919년 그가 귀국한 지 얼마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부친의 논 5두락(斗落)을 매각하여 자금을 준비하고는 서적행상(書籍行商)을 가장하여 전국 각지로 돌아다니면서 일제에 의해 자행된 학살(虐殺)·방화(放火)·고문(拷問)등을 자세히 조사하여 그 결과를 세밀하게 작성하였다. 그리고 7월 미국군함이 인천항(仁川港)에 들어오는 것을 기회로 하여, 그는 작성된 조사서를 군함 승무원인 경북출신(慶北出身)의 김상철(金相哲)에게 부탁하여 미국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영문(英文)으로 번역하여 세계 각국에 배부할 것을 의뢰하였다. 그후 부산(釜山)에서 조선일보지국(朝鮮日報支局)을 운영하기도 하였으며 약장사를 하기도 하였던 그는 1926년 1월 이내성(李乃成)을 만나 독립운동의 전개방법에 대해 협의를 하였으며, 1927년 4월경에는 이내성의 소개로 경북 경산군 경산시장(慶山市場)에서 국제공산당원으로 자칭하는 굴절무삼랑(堀切茂三郞)을 만나 관공서(官公署)·은행(銀行)·부호(富豪) 등에 폭탄을 투척하여 민심을 동요하고 자극시킴으로써 혁명을 촉진해야 한다는 주장을 듣고 약 한달이 지난 뒤, 굴절이 만주에서 몰래 들여온 다이나마이트의 뇌관과 도화선, 그리고 50원의 자금을 받고 폭탄제조법을 주의깊게 배웠다. 그리하여 1927년 8월 그는 폭탄 2개를 시험용으로 제작하여, 칠곡(漆谷)과 선산 경계에 위치한 봉화산에서 성능실험을 하고, 이어 1927년 10월 16일 거사용 폭탄 4개와 자살용 폭탄 1개를 제조하여 경북도청·경북경찰부·조선은행 대구지점, 그리고 식산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하려고 하였다. 그는 10월 18일 오전 9시경, 대구 덕흥여관에서 폭탄에 점화포장을 하여 여관 종업원이 박노선(朴魯宣)에게 거사 목표지점 4개처에 송달을 부탁하였다. 같은날 오전 11시 50분쯤, 폭탄이 폭발하여 은행원과 일제 경찰 등 5명이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며 은행 창문 70여 장이 완전히 부숴졌다. 일경은 폭탄을 운반하였던 여관 종업원 박노선을 체포하여 취조하였으나 그의 신원을 알아내지 못하였다. 한편, 여관 종업원이 폭탄상자를 들고 은행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한 그는 선산군 해평면(善山郡海平面)으로 피신하여 안동(安東)과 영천(永川)에서 재차 거사를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1928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가 대판(大阪)에서 안경점을 경영하고 있던 동생 장의환(張義煥)을 마지막으로 만나고자 대판으로 가서 며칠을 머무르던 중 그를 검거하고자 본국에서 온 경북경찰부의 형사들에게 1929년 2월 13일 밤 습격을 당해 피체되었다. 본국으로 송환되어 취조를 받은 그는 일제의 주구로 전락한 조선인 경관들에게 "조선 민족의 피를 받은 자로서 일제 경찰의 주구가 되어 동족의 해방운동을 이다지도 방해하는 악질 조선인 경관의 죄상이야말로 나의 죽은 혼이라도 용서할 수 없다"고 부르짖어 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자신의 거사는 단독으로 실행되었음을 주장하면서 일경의 혹독한 고문을 받은 그는 반년만에 1심 재판을 받아 사형이 언도되자 그 자리에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여 불굴의 독립의지를 과시하였다. 2심 재판에서도 역시 사형이 언도되었으며 고등법원(高等法院)에의 상고 역시 기각되고 사형이 확정되었다. 1930년 6월 5일, 그는 일제에 의해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는 것이 일제에 대한 마지막 항거라고 생각하여, 그날밤 11시경 자결·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