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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 오화영. 서울 종로 사람이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중의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피체되어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7년 2월 15일 서울 종로에 소재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신간회의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간사 35명중 한사람으로 피선되어 독립정신고취와 민족정기 함양에 힘썼으며 동년 7월 21일에 경성지회 임시대회에서 간사위원으로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1930년 5월 23일 물산장려회가 개최한 총회에서 고문으로 추대되어 국민정신 계몽과 국산품 장려운동을 전개하였다. 1930년 11월 서울에서 한용운 등과 함께 광주학생운동 당시 일제의 탄압을 규탄할 것을 결의하고 결의문을 인쇄하여 각 신문사와 단체기관 등을 포함한 전국 각지에 전달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광복후 과도입법의원 등으로 활동하다 6·25당시 북한에 납치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