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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공은 1884년 5월 21일 개성 김계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명 용흘이고 아호는 백포이다. 재능이 기발하여 신동이라고 일컬었다. 일찌기 인술에도 빼어남으로서 명의로서의 찬탄이 자자하였다. 때마침 국운이 기울여 왜의 침략이 날로 심하여 감을 개탄한 남어지 동지들을 규합하여 신출귀몰하게 항일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왜경의 감시가 삼엄하게 되자 부득기 모든 가솔을 데리고 만주 장백현으로 이사하였다. 고향을 떠나가는 그 심정이 괴로워서 춘일사양광세객 가산려수인난과의 시구도 읊었도다. 그곳에서 농장을 위장하여 항일용사를 양성시켰다. 나아가서 본인이 선봉이 되여 압록강 연안을 누비면서 주재소 및 신갈파경찰서를 습격함으로서 독립군 13명을 탈출시켰으나 왜경의 보복을 받아 농장막사가 방화 사격을 당하여 훈련생교 10명과 아들 희영 희규도 총살되었다. 그 후 1919년 8월 4일 군비단을 조직함에 즈음하여 이은경을 단장으로 본인은 군사참의장에 피선되어 국내에 잠입 작탄으로서 폭동을 일으킴을 주목적으로 하여 투쟁하였다. (안도산전서 727면 기) 1921년 10월 14일 상해임시정부 지령으로 재만 항일 각 단체들을 결합시켜 대한민국단을 조직함에 있어 군사부장에 피선되어 장정 훈련과 군자금 모집 및 군수품 공급에 헌신하였다. (대한독립운동사 5권 316면 기) 그 후 년조 미상이오나 군비단장에 취임되어 거의 30여년 긴 성상을 거처 동삼성 일대를 구석구석 누비면서 항일투쟁한 혈투에 공은 지금도 겨레의 앙모 속에 엄연히 남아있도다. (한남도지 600면 기) 이에 대한민국정부는 그 굳건한 호국충절을 후세에 높이 기리기 위하여 1977년 12월 19일 대한민국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독립유공자공훈록 제4권 322면 기 정치학박사 청옥 김명진 삼가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