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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산 남록 4시 장청의 푸른 송백으로 둘러싸여 있는 일좌 명당에 우리의 스승이신 범정 장형 선생이 단국대학교의 모든 학원을 미소하여 지켜보시며 영생하여 누워 계시다. 유유하게 천만년 흘러가는 저 한강수처럼 우리들 단대 학구들의 구국자주자립의 정신으로 자라나는 모습을 거룩한 영감으로 휩싸안아 애무해 주시네. 선생은 인동장씨 태사공의 후예로 고의 휘는 창익 진사공이요. 비는 파평윤씨다. 선생은 1889년 기축 1월 18일 평북 용천에서 진사공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오과인하야 동명중학을 졸업한 후에 웅지를 품고 고려대학교의 전신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당시 국운은 비색해서 1905년 광무 9년에는 일본의 이등박문이 황제를 위협하야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했고 1910년 경술 융희 4년에는 드디어 경술합방의 국치를 당하게 되었다. 선생은 민족의 비운을 앉아서 바라만 보고 있을 수 없었다. 분연히 학창을 박차고 도산 안창호 의암 손병희 선생들과 함께 뜻을 모아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만주와 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올랐다. 남선 북마 독립군을 지원하고 군자금을 조달했다. 풍찬노숙 막천석지 36년간의 지사의 고난은 일일이 매거할 길이 없다. 다행히 천운이 회복되어 1945년 나라가 광복되니 선생은 가슴에 가득 벅찬 희망을 안고 고국으로 돌아와 국민동지회를 조직했다. 당시 민족은 비록 해방의 기쁨을 맞이했다 하나 사회는 좌우양익으로 사상이 분열되어 혼란의 극을 이루었다. 선생은 민족의 백년대계를 위하는 길은 오직 학문으로써 건국인재를 양성해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내렸다. 1947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6천년 배달민족의 얼을 받들어 국가의 동량적 인재를 양성하기 시작했으니 이것이 곧 단국대학이다. 이듬해 1948년에는 대학인 최고학부도 좋지마는 국민교육은 소년때부터 확고불동한 정신자세의 수립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구 백남학원을 인수하여 단국중학과 공업고교를 다시 창립하니 아릅답다. 이에 단국학원은 이제 만여 인재를 배출시키면서 대한민국 굴지의 대학원이 되었다. 1963년 정부에서는 선생의 독립운동과 대학창설의 큰 공로를 찬양하야 건국공로훈장을 전달했다. 선생의 한 평생은 독립투사였다. 근대화와 삼일정신을 바탕으로 해서 항상 구국자주자립의 3대정신으로 교수와 학생을 지도하시며 이 3대정신으로 학풍을 완성하셨다. 이것은 영원불변하는 단국대학의 학풍이 될 것이다. 인생 70이 예로부터 드물다하나 하늘은 어진 이에게 수를 더 빌려주지 아니하야 1964년 갑진 12월 30일 향년 76세로 큰 별이 떨어지니 단국의 학생과 사회의 애도하는 슬픔은 남산 기슭에 푸른 안개를 이루었다. 학원 후록 자좌 오향에 안장해 모시고 1975년 9월 20일 단국학원은 이 추모비를 세운다. 선생은 3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용식이요 차남은 봉식이요. 3남은 충식이다. 손자 손녀가 13명이나 되다. 아름다운 유덕이여. 하늘은 길이길이 경복을 내릴 것이다.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 문학박사 박종화 짓고 김충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