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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세(趙秉世) 선생 묘 지정번호: 시흥시 향토유적 제5호/ 지정일자 : 1986.3.3 / 소재지: 시흥시 조남동 산121-7 / 시대: 묘 - 광무 9년(1905), 사적비·와비 - 1990.12.1 조병세(趙秉世, 1827~1905) 선생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순국열사로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치현(穉顯), 호는 산재(山齋)이다. 1859년(철종 10)에 문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암행어사, 대사성, 대사헌, 예조판서, 좌의정, 중추원(中樞院) 좌의장(左議長) 등을 역임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민영환(閔泳煥) 등과 함께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처형과 을사조약(乙巳條約)의 무효화를 주장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유소(遺疏)와 각국 공사 및 국민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였다. 시호는 충정(忠正)이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다. 묘는 마하산 동쪽에 있는데, 선생의 묘는 위에서 세번째이다. 묘 앞에는 상석·향로석이 있고, 그 좌우에 망주석이 있다. 1990년 12월 1일에 선생의 사적비(事蹟碑)와 와비(臥傳)가 세워졌는데, 사적비는 묘의 오른쪽에, 와비는 왼쪽에 각각 배치되어 있다. 사적비의 비문은 국한문 혼용으로 백아(白牙) 김창현(金彰顯)이 짓고, 글씨는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이 썼으며, 와비는 선생이 남긴 유소(遺疏)와 국민에게 고하는 유촉[告國民遺囑],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글[致各國公使]로 이루어져 있다. 글씨는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이 썼다. 다음의 글은 선생이 순국하기 전에 남긴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글'의 내용이다. “병세(秉世)가 전일 일사(日使)의 늑약(勒約)한 일로 각 공사관 여러 각하에게 알리었는데 끝내 한번 회합 담판을 하지 못하게 되니, 분심(憤心)이 가슴을 버리어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여러분은 이웃 나라의 우의를 멀리 생각하고 약소국가를 동정하시어 공동회의로 우리의 독립권을 회복하게 된다면 병세는 죽어서도 결초보은(結草報恩)하겠습니다. 정신이 어지럽고 숨이 차서 무어라 말을 하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