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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 3월 1일 독립운동의 불길은 수촌마을에도 번지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밤새워 태극기를 휘날리며 동네 밖을 나서자 석포리 방면에서 밀어닥친 주민들과 합세하여 장안면, 우정면 두 사무소를 차례로 점거하고 서류를 모조리 불태우고 다시 삼괴반도 주민까지 합세된 기운으로 쌍봉산 뒤에 올라가서 드높이 만세를 부른 다음에 산을 내려와 화수리 경찰관 주재소 앞에 이르러 왜경에게 항복을 요구하며 대한독립을 선언하니 이에 당황한 일본인 순사부장은 군중에게 마구 총질을 하다가 맞아 죽었다. 보복의 앙심을 품은 왜병은 다수 병사를 동원하여 4월 15일 이른 새벽에 이 마을을 급습하여 교회당과 가가호호에 불을 지르니 불의의 변을 당한 마을 사람들은 황급히 뛰어나가 불을 끄려 했으나 대기했던 왜병들의 총칼을 맞아 많이 죽거나 다치고 마흔 두 집 중 네 집만이 남은 채 온 마을은 비명소리와 함께 잿더미가 되었다. 이때에 이 참변을 듣고 달려온 한 외국인이 있었으니 그는 호랑이 석호필이란 우리말 이름의 카나다 선교사인 프랭크 스코필드였다. 그는 1916년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가 3·1만세 때 죽거나 다친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을 구호하였으며, 서대문과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남녀애국청년들을 찾아가 위문하는 등 동분서주하면서 일제의 횡포상을 세계만방에 폭로했다. 그가 수촌마을에 찾아온 것은 4월 18일 바로 이 언덕 위에서 슬프게 우는 한 여인을 만나 그 참상을 소상히 들은 다음에 먼저 부상당한 분들을 위문하고 그 불구의 몸을 이끌고 서울까지 여러 번 왕래하면서 부상자의 입원가료에 온갖 정성을 다했다. 그러나 그 중 몇 분은 드디어 생명을 잃고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순모 외 스물 네분은 검거되어 최고 15년까지의 징역을 선고받았으며 한편 호랑이 석호필은 1920년 국외로 추방을 당했으나 "끌 수 없는 불꽃"이란 책을 써서 한민족의 의거를 세계 만방에 보도되었다. 그는 우리 정부의 초빙으로 다시 한국으로 와서 1960년에 대한민국 문화장을 받고 1970년 4월 12일 82세에 이승을 떠났는데 그의 평생 소원은 한국 땅에 묻히는 일이었으므로 정부에서는 국립묘지의 애국지사 묘역에다 사회장으로 안장하였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인생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하더니, 여기 마을 사람들은, 호랑이와 의좋게 오래오래 살며, 길길이 낙원 이루리라. 이제 우리 후진은 수촌마을 지사들과 호랑이 석호필의 고귀한 정신을 뒷날에 길이 전하고자 여기 기념비를 세우니 그 당시 옥고를 치른 지사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차희식, 이영쇠, 장소진, 장제덕, 정서성, 차인범, 이순모, 차병한, 김흥식, 정순영, 김정규, 백순익, 인수만, 김명우, 김교철, 김여근, 김응식, 김덕근, 차병혁, 김종학, 김정희, 김황운, 윤영선, 김덕삼, 류수산 오리 전택부 글 짓고, 원곡 김기승 글씨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