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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一 獨立運動 紀念碑(3.1 독립운동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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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괴 한가운데 산자수려하게 자리잡은 두 봉우리는 이 고장의 수호신으로 쌍봉산이라 한다. 옛부터 이산은 승지로 득명하여 뭇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산 기슭에 조선 초기부터 60여칸의 큰 쌀 창고를 지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젖줄이 되었고 지금은 이 고장 문화의 총본산으로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의 도장이다. 고려 충정왕 3년 단기 3684년 8월에도 왜구가 이곳 쌍도를 대거 침입하여 민가에 함부로 불을 지르고 노략질을 하였으며 임진왜란때는 무려 7년이란 장구한 세월 전국이 초토화되어 국운이 가물거릴때 민족의 성웅 이순신장군께서 서해맹산의 기함을 토하시며 민족정기를 드높이시니 혼비백산하여 패주한 도적의 무리들은 300여년동안 감히 이 땅을 넘보지 못하였다. 그후 나라의 정세가 어지럽게 되자 일제는 침략의 마수를 뻗쳐 이 땅을 식민지화하였다. 이에 격분한 민족지도자들이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겠다는 구국정신으로 3.1독립만세 운동의 횃불을 올리었다. 만세의 물결은 마침내 그해 4월 3일 이지역으로 파급되어 몇사람의 천도교인들이 앞장서니 주민들은 너나없이 태극기를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각처에서 수촌리로 모여들었다. 여기서 행렬을 정비한 천여명의 시위군중은 어은리 은골의 장안면사무소와 화산리 사기말 우정면사무소를 모두 차례로 불태우니 연기가 하늘높이 치솟았다. 흥분한 만세행렬은 쌍봉산에 올라 백의의 인산을 이루어 목청 높이 조선독립만세를 합창하여 천지를 진동시켰다. 군중은 다시 화수리로 행진하여 주재소를 몇 겹으로 포위하니 때는 오훈 5시경이었고 군중은 2000여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이때 독립을 부르짖는 시위군중에게 주재소 소장 가와바다가 무차별하게 쏘아대는 총탄에 맞아 세명이 죽고 두명이 부상하였다. 이 참상을 본 군중들은 분에 넘쳐 투석과 각목으로 치열하게 저항하여 드디어 주재소에 불을 지르면서 달아나는 가와바다를 붙잡아 민족의 이름으로 처형하였다. 군중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다시 자주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쳐 이 나라가 우리의 것임을 만방에 당당하게 천명하였다. 앙심을 품은 일제는 많은 병력을 출동시켜 4월 6일 수촌리를 시작으로 11일 화수리에 몰려와 수일간 갖은 악랄한 만행을 자행하여 사망자 22명 부상자 17명 옥고를 치른분이 34명 불에 탄 가옥이 백여호 혹독한 고문을 당한 사람이 수백명이나 되었다. 이 곳의 독립운동은 전국 어디에서도 거의 그 짝이 없을만큼 격렬하였으면 그 여세는 바로 4월 5일 이웃 발안시장터로 이어졌고 다시 4월 15일 제암리에서 천추만대의 잊을 수 없는 참혹한 학살을 빚어놓고 말았다. 선열들의 독립만세운동은 뒷날 자주독립의 새싹이 되어 단기 4278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다. 이에 3.1운동 70주년을 맞이하여 뒤늦게나마 온 주민들의 정서을 함께 모아 지사들의 거룩한 호국정신을 마음속 깊이 되새기면서 깊고 자랑스러운 역사의 현장을 정화하여 두번다시 이땅에 치욕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않기를 굳게 다짐하는 엄숙한 징표로 이 비를 세운다. 단기 4322년 8월 15일 이종학 삼가 짓고 한동인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