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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에 대종교에 입교하였으며, 1912년 상해에서 신규식 등이 조직한 동제사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을 하였다. 1918년에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할 사절단의 자금을 간도, 노령에서 인수하여 전달하였으며 1919년에는 대한독립의군부의 조직에 참여하여 서무를 담당하였다고 한다. 1919년 4월에는 의군부의 기밀사로 상해에 출장하여 이동녕 등과 함께 길림의 상황을 보고하고 국내에서 새로 온 청년들에게 폭탄제조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1919년 4월에 개최된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의정원 회의에 참석하였다. 당시의 임시정부는 재정의 조달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그 동안은 각 지방에서 모여든 인사들 중에 자금을 가져오는 이도 있었고, 또 각기 가까운 계통을 통하여 자금이 들어오기도 하였지만 정부의 조직 또는 운영을 위하여 이를 솔선하여 공식적으로 희사하는 경향이 적었으며, 또 정부의 조직과 함께 5월에 개최된 제4차 의정원 회의에서는 구급의연금의 모집을 결정하고 각 도별로 구급 의연금 모집위원을 선출하였지만 그것이 당장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신규식·조소앙 등 임정 요인들은 동년 5월초에 의정원 의원인 김덕진과 함께 그를 국내로 밀파하여 서울의 정두화를 찾아 자금 조달을 원조 받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귀국 도중에 일경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