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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초명은 병우, 자는 순재, 호는 석란이다. 1878년 10월 21일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 석곡리 555번지에서 아버지 연채우와 어머니 전주 이씨의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926년 8월 19일 오전 10시 일본 영사관 횡가에서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그토록 열망했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48세의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선생은 1897년 관립 외국어 학교를 졸업하고 영국에서 유학했으며, 귀국하여 궁내부주사로 발령받아 인천 해관방변으로 관직에 입문하였다. 1898년 주일공사를 수행하여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외교사무를 수행하던 중 1907년 정미칠조약이 체결되자 공직을 사퇴하고 귀국하였으며, 청주군수를 제임받았으나 일본제국주의의 통감정치하에서는 어떠한 공직도 맡지 않겠다고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1908년 중국에서 해관원으로 일하며 배일활동을 하던 중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나라를 강탈당하자 분개한 나머지 자신은 물론 동생 연병호를 중국으로 망명시켜 독립운동에 가담케하였으니 그 위대한 업적은 일제 고등경찰 요사 등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선생은 1919년 간도에서 독립운동가를 후원하다 체포되어 2개월 간의 옥고를 치룬 바 있으며, 1920년 상해 대한인거류민단 산원으로 활동하였고, 여운형이 단장으로 있던 거류민단병사회의원으로도 활동하는 등 일제의 총칼 앞에 분연히 맞서 목숨 걸고 고군분투하였으며, 독립자금도 마련하여 헌납하였다. 따라서 정부는 대한민국의 자주독립과 국가 건립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2008년 3월 1일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니 지하에 잠드신 영령이나마 위로받게 되었다. 이와 같이 자신은 물론 가족의 생계와 운명은 생각지않고 오로지 국가와 민족만을 위해 목숨 바쳐 일제에 맞서 싸운 그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이야말로 우리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겨 널리 선양해야 할 위대한 업적이 아닐 수 없어 3만5천여 증평군민의 뜻을 모아 그 공적을 오석에 새겨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 서기 2011년 11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