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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지역의 3·1운동 3·1운동은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령하에 통치하는 동안 일어난 최대의 민족독립운동이다. 1919년 3월 1일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50일 가까이 각계각층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여 서울과 지방은 물론 중국 일본 러시아 미주등 국내외적으로 확대된 20세기 한국민족 독립운동의 분수령이었다. 이러한 3·1운동을 촉발시킨 민족대표 33인 중 손병희 권동진 권병덕 신석구 신흥식 정춘수(후에 변절) 6인이 충북 출신인 점은 충북인의 크나큰 자랑이다. 충북지역의 3·1운동은 3월 2일 독립선언서가 청주에 배포되어 여러차례 시위를 꾀하였으나 사전 발각되는 등 일본관헌에 의해 저지되다가 3월 19일 괴산읍장터에서 홍명희 등의 주도로 본격적인 만세시위운동이 시작되었으며 이후 4월 19일 제천 송학 시위까지 만세함성이 그치지 않았다. 당시 충북지역의 시위는 경기지역과 함께 전국에서 가장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충북의 만세시위는 사람들이 쉽게 모일 수 있는 장날에 주로 이루어졌다. 시장이나 관공서 주변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태극기를 높이들고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일본관헌의 체포연행에 맞서 낫 곡괭이 몽둥이 돌멩이 등을 들고 경찰주재소나 면사무소를 습격 파괴하는 등 강압적인 식민통치의 무력진압에 격렬히 대항하였다. 충북지역의 3.1만세운동은 유학자와 젊은 농민과 학생층의 주도와 참여가 두드러졌다. 특히 충북은 낮은 시위뿐 아니라 밤에도 횃불만세라는 독특한 시위를 전개하여 일본군경의 무력진압에 직접 맞서기 어려운 노약자들까지 호응하였다. 남녀노소가 밤에 주변 산위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거나 횃불을 들고 만세를 부르는 횃불만세운동은 인근 충남, 강원, 경기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충북의 3·1운동은 도내 전역에서 150여 차례 수 만 명의 민중이 참여하여 수 백 명의 인명피해를 냈지만 1910년대 후반 의기소침하던 의병운동의 맥을 살려 새로운 민족독립운동의 깃발을 올리면서 1920~30년대 한국민족운동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3·1운동을 촉발시킨 것은 민족대표 33인이었지만 이 운동을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승화시켜 세계의 이목을 집중케 한 것은 농민을 중심으로 한 이 땅의 민중들이었다. 2010년 3월 1일 3·1공원정비추진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