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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왜적에 가혹한 학정은 일증월가하여 생민에 도탄은 멸말에 부닥쳤다. 천운이 간중하여 기미2월이 닥쳐오자 수도로부터 독립만세가 시작되자 삼천리 강산에 독립만세 함성이 방방곡곡에 메아리치고 이러낫다. 공이 때를 계기로 하여 인근 동지들를 찾아 고취진작을 시키며 3월 1일에 병천시를 이용하여 군중을 규합하고 태극기발아래서 독립만세를 재성고창하며 질서정연이 왜적 분견소를 향하고 돌진하였다. 헌병소장은 사태가 급박함을 보고 천안본소로 응원을 받아 왜병이 두대의 차로 나려와 무자비하게 군중앞에 총을 난발하여 군중은 혼불부분하고 당황히 우왕좌왕하던 가운대 공은 언색을 불변하고 독립만세를 부르자 적은 공의 면전에 육박하였다. 공은 적수공권으로 적과 충동하자 적의 흉봉은 공의 복부를 처 오장이 탈출하고 흉탄은 융배를 관통하였다. 그러나 공은 만세를 생명이 다랄때까지 구불정성하시다가 인하야 장열한 순절을 하셨다. 슬프다 여자신도 현장에서 처절한 광경을 목시하고 공을 위하여 애도의 경의를 표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나신후 28년 을유에 해방이 되어 독립의 기발이 날리였다. 공의 장손 만순과 족손 창순보가 공에 위대한 공적이 연몰무전함을 원통이 역여 진정서를 중앙청 총부처와 문교부에 상정하여 애원이 호소하였다. 총무처는 사실을 심사위원회에 회부하여 엄밀한 심사를 거듭하여 실적이 뚜렷이 드러나자 인하여 공에 고귀한 이름을 순국선열 사책에 같이 올리고 춘추기념식전에 향화를 누리게 되셨으니 어찌 만순에 근천지요화 창순보에 주선한 성력이 아니리오. 공의 묘소는 성재리 안령산 계좌원이며 부인 수성최씨는 공묘에 합폄하였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