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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홍식(申洪植, 1872~1937) 본관은 고령(高靈)으로 가덕면 인차리 출신이다. 35세 때에 청주 북감리교회에 서미국인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1913년 서울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었다. 평양남산현교회(平壤南山峴敎會)목사로 재임하던 1919년 2월 이승훈(李昇薰)으로부터 3·1운동의 계획을 전해듣고 기독교측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날인 하였다 2월 28일 손병희의 집에서 열린 민족대표의 최종 모임에 참석하였고, 3월 1일 독립선언식에 참가한 뒤 일제에 피 체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종교활동과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1 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