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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사람을 나리사 무디어진 겨레의 넋을 일깨우고 흐리어진 민족의 정신을 깨치어 민족의식을 제자리잡게 하기위하여 비바람 한평생을 지사로 사가로 석학문호로서 역사를 움직이게 한이 있으니 이는 단재 신채호선생이시다. 일직 1880년 고종 17년 경진 11월 17일 대덕군 정생면 도림마을에서 나시고 청주 낭성면 고디미에서 자라시니 본관은 고령 부친은 휘 광식 모친은 밀양박씨로 그 두째아드님이요 어려서부터 슬기 뛰어나시었다. 조부 신성우선생에게 한학닦으시다가 열아홉에 상경, 단서 신기선ㅅ공의 천으로 성균관에 드시고 1905년 2월 성균관 박사되시며 때에 을미의 협약으로 장지연선생 '시일야방성대곡'의 언봉들어 투옥되시자 선생이 뒤를 이어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으로 혹은 1906년으로 경술국치까지 왕조말 민족주의 마지막 방패이던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되시어 배일사상과 독립사상을 높이는 한편 1907년에는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담하고 혹은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는등 기우러져가는 조국을 바로잡고져 젊은가슴을 애태우시었다. 1910년 경술 나라안에서는 장지를 펼 수 없으매 그해 가을 동지 안창호, 이갑, 이종호선생과 중국 처도를 거쳐 노령해참성에 망명 해조신문을 내어 독립사상의 고취와 동지 규합에 힘쓰면 1914년 봉천성 회인현에 머물러서는 한국사 약술에 착수하여 백두산을 답사하며 남북만주를 고루 밟아 고구려의 고적과 광개토대왕을 찾고 1915년에는 북경에서 한국사의 사료를 ??한편 신규식선생으로 더불어 신한청년회를 조직하고 박은식, 문일평선생과 박달학원을 세워 해외의 우리 젊은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