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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선생의 역사학 1910년 해외로 망명한 그는 본격적으로 국사연구에 노력, 1920년대에 이르러 「조선상고사 朝鮮上古史」·「조선상고문화사 朝鮮上古文化史」·「조선사연구초 朝鮮史硏究草」 등 그의 역사연구의 주저(主著)들을 집필하였고, 1930년대에 「동아일보」·「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 그의 역사학은 사학의 이념이나 방법론에서 중세의 사학을 극복하고 근대적인 사학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당시 일본 관학자(官學者)들의 조선사연구자세에서 보이는 식민주의적 사학을 극복하는, 민족주의적 사학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며, 조선혁명선언 이후 역사의 주체를 민중에게서 발견하려는 민중중심사관이 뚜렷이 나타나며,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서 파악하는 한편, 역사연구에 있어서 실증(實證)을 강조하고 있다. 그의 한국사기술은 거의 고대사에 국한되고 있는바 그 특징은 다음 몇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단군, 부여, 고구려 중심으로 상고사를 체계화하였고, 둘째 상고사의 무대를 한반도, 만주 중심의 종래의 학설에서 벗어나 중국 동북지역과 요서지방(遼西地方)에까지 확대하고 있으며, 셋째 종래 한반도내에 존재하였다는 한사군(漢四郡)을 반도밖에 존재하였거나 혹은 전혀 실존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으며, 넷째 상고시대의 조선족과 삼국시대의 백제가 중국의 산둥반도 등에 진출하였다는 것이며, 다섯째 삼한의 이동설 및 '전후 삼한설'을 주장하였고, 여섯째 부여와 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에 따라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적으로 과소평가 하는 것 등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