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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반만년 역사상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그 이름을 청사에 빛낸 충신과 열사 그 수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일거에 전국민이 궐기하고 세계만방을 놀라게한 기미독립운동이야말로 역사적인 사실이 아닐수 없다. 이를 영도하고 횃불을 높이 든 민족이 대표 33인! 그중 한분이 이고장에서 생장한 동이 신홍식선이시시다. 선생의 성은 고령신씨요 바로 이조시대 대정치가이며 한글창제에 공이 많으신 휘 숙주의 17대손이며 유학으로 저명하신 선? 휘 용휴의 손이오, 휘 기우의 제2남이르 1872년 임신 3월 1일에 나시었다. 일찍 한문에 능통하시었으나 신문화에 개화되어 1913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시고 목사가 되었다. 당시 우리민족은 경술국치 이후 폭정하에 신음케되여 이를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다가 미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의 제창을 계기로 봉기하게 되었다. 선생께서는 이에 앞서 목사로서 평안남북도 지방을 순회 설교함을 병희동지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선포하신뒤 곳(곧) 왜경에게 체포되어 3년의 옥고를 겪어시고 1922년 출옥하시었다. 그후 10여년간 김리사로서 인천, 원주등지 각 교회에서 설교를 통하여 애국시만애개 국가의식과 민족정신을 고취하여 오늘의 광복을 인도하시었다. 1935년 신병으로 고향에 돌아오시어 요양하시다가 1939년 을유 3월 18일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신채 68세를 일기로 영면하시었다. 초배는 전주이씨이며 속배는 김해김씨이니 아들은 대호인데 조졸하고 여서는 파평 윤진억, 삭령 최대순, 양천 허한동이며 사손은 덕수이다. 기미운동 50주년을 맞이하여 정부의 보조로 석포에서 이곳 차인후산으로 면봉하고 도민의 성금으로 이비를 세우다. 그 횃불은 삼천리강산에 빛나고 그 정신은 천추만세에 흐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