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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월 후, 신학구선 생의 공적기념비를 찾아서 청원군 낭성면 관정리를 찾았다. 인터넷에 청원군 낭성면으로만 선생의 공적기념비가 있다고 되어있다. 하지만 찾을수가없다. 아래가 그 공적기념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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碑 文 始祖高麗檢校軍器監 成龍之后 八世 領議政 文忠公 叔舟 第七子 靈城君 洞을 派祖로 二十一世 友模 配晋州鄭氏의 長子인 선생께서는, 1877년 7월 3일 충청북도 청원군 낭성면 귀래리 300번지에서 출생하여, 1968년 2월 28일 같은 면 관정리 202번지에서 세상을 뜨기까지, 오로지 우리나라의 자주독립과 국가발전을 위해 일생을 바치신 독립유공자이시다. 선생은 일찍이 3.1운동 민족대표인 申洪植, 申錫九 그리고 같은 향리에서 출생한 애국지사 申采浩, 申圭植, 申伯雨 등과 친족 간으로, 성장기의 친교를 통해 애국애족사상을 키워왔으며, 1919년 3.1운동이 거국적 민족운동으로 전개되자 3월 11일부터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들어갔다. 1919년 3월 30일, 청원군 미원 장날을 이용하여, 시장 네거리에서 독립만세를 주도하다가 일본 헌병의 총탄에 의해 오른쪽 상복부에 부상을 당한 채, 조카 申聖休와 申庚九, 李水蘭, 申鼎植, 李瑞九 등과 같이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 구금되기에 이르렀으며, 이로 인해 같은 해 5월 5일 징역 10월을 선고 받아 구금 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 때 얻은 신병은 완치되지 못하고 결국 선생이 고통 속에서 일생을 보내는 원인이 되었다. 선생은 출옥한 1921년부터, 고향에서 청소년들에게 민족투쟁정신을 길러주었으며, 세상을 뜰 때까지 조국의 자주독립과 민족정신 고양을 위해 노심초사하여, 특히 3.1절과 8.15 광복절에는 병든 몸을 이끌고, 빠짐없이 소재지 산동국민학교에서 만세 선창으로 주민과 학생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고취시켜 왔다. 이 같은 선생의 공로가 뒤늦게나마 자손들의 노력으로 인정받게 되어, 1990년 8월 15일 광복절에는,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으니, 이는 가문의 영광이요, 모든 이들의 귀감이 된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은 선생의 손자 은우(恩雨)의 요청에 따라, 노산 이은상(鷺山 李殷相) 선생이 엮은 독립운동사 기록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적었으며, 널리 후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우리말로 적었음을 밝혀둔다. 서기 1995년 8월 15일 지은이 洪 駿 基 쓴 이 黃 冕 秀 유 족 申 恩 雨 英 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