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휩쓰자 국내외의 여러 지사와 더불어 전민족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그 지도자로 추대 되시었다. 4252년 2월 27일에 선생을 필두로 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동년 3월1일 정오 탑골공원에서 이를 선포하니 우리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세계 만방에 알리는 독립만세 소리가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 천지를 흔들었고 이로써 우리의 임시정부가 상해에 서게 되었다. 선생을 비롯한 33인의 민족대표는 왜경에 붙들리어 서대문 감옥에서 갖은 고초를 당하시던 중 선생은 모진 병환을 얻어 보석되니 서울 상춘원에서 요양하시디가 4255년 5월 19일 드디어 환원하셨다. 향년이 예순둘이요 서울 북한산 밑 우이동에 묻히셨다. 아! 선생의 민족을 위한 일대의 서원은 중도에 꺾이고 말았으나 갑오혁명에 선봉이 되고 갑진 개화에 횃불을 들었으며 기미독립의 진두에서 이 민족을 이끄신 그 맥맥한 정기는 날이 갈수록 빛을 더하고 있다. 이 터전은 산생이 태어나신 옛터요 조국을 위한 불타는 정성을 가꾸시던 고장이다. 풍우당년의 크나큰 감개는 아직도 백성의 마음에 생생히 살아 있거니와 선생이 드리우신 그 높은 정신을 길이 천추에 전하고자 이 비를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