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page


86page

년 양주군수와 양주경찰서장의 효행표창을 받았고 같은해 3월 26일 경기도 지사의 표창을 수상하므로써 후손들에게 백행의 근본인 효행과 정직과 가족애에 대하여 남달리 모범을 보여주셨다. 1910년 국권을 빼앗긴 우리 민족의 암흑기인 일제 치하가 시작되자 공은 망국의 한을 되새겨 향리 주민들에게 자주와 주권을 되찾기 위한 계도를 하고 나라를 위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서기 1919년 3월 1일 조국의 독립을 부르짖는 민족의 함성이 전국을 뒤흔들때 공의 나이 31세인 그해 3월 27일 백석면 연곡리에서 애국지사 안종규 종대 이사범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백석면사무소 앞까지 시위행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로써 그해 5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6월형을 언도받고 상소하였으나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과 8월 28일 일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강직한 성품과 투철한 애국정신으로 공이 일제침략에 대항하여 투쟁해온 애국일념의 드높은 기상과 곧은 절개는 애국의 충절으로 모든 국민들에게 나라사랑의 귀감이 되었다. 대한민국정부는 그 공훈을 기려 1992년 4월 13일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공이 일제의 혹독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국권을 찾고자 투쟁하였던 애국정신을 되새기고자 양주향토사료연구소 정용철 소장과 강호제현의 발의로 추모비를 세우게 되었다. 슬하에는 태용 태철 두아들과 다섯딸을 두었으며 1984년 7월 17일 타계하시어 백석면 연곡리 산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