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page


66page

거점으로 이윤의 씨 등 동지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켜 의정부를 휩쓸었으니 그 용기와 애국심은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케했으며 계속되는 항일독립운동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는 삶이라 하겠고 그 시대의 사표라 할 수 있다. 또 1936년 8월 선생은 천도교 양주교구장 자격으로 황해도 은율에서 가진 전국 멸왜 기도집회에서 천도교구장 대표 특별기도회에 참석 암약하다 발각되어 왜경에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이른바 무인멸왜기도사건으로 신의경찰서에 구금 수감도시니 옥중에서 왜경의 가혹한 고문을 당하시면서도 초지일관 굽힘없이 심한 고문때마다 큰 소리로 "멸왜기도문"을 외쳐 왜경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게 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1939년 봄 극심한 고문으로 신병을 얻어 출옥은 되었으나 동년 5월 2일 혹독한 장독을 못이겨 순절하시니 향년 49세로 일생을 마치셨다. 젊어서는 농촌 민중계몽과 물산장려의 애향운동 그리고 장년에는 천도교인으로써 일제 침략에 대항하여 항일독립투사로 투쟁해온 애국일념의 높은 기상과 곧은 절개는 낮은 듯하지만 진정 높은 기상이라 할 수 있으며 그 높은 성품과 넓은 포부 깨끗한 정신은 우국의 지사로서 후인들에게 나라사랑의 귀감이 되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 묘소는 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