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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문부 선생묘와 충덕사 이곳은 임진왜란 의병대장 충의공 농포 정문부(1565~1624) 선생의 묘와 위패 영정을 모신 충덕사이다. 정문부는 해주 정씨로 서울에서 태어나 선조 21년에 과거에 차석 급제, 승정원 사헌부등에서 문관으로 있다가, 선조24년에 함경도 북평사에 부임, 이듬해(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 함경도가 카또오키요마사의 왜국에게 짓밟히자, 일부 도민이 반역하여 두 왕자(임해군과 순화군)와 고관들을 왜군에게 잡아 넘기고 오랑캐가 남침하는 등 함경도가 안팎 3면의 난리에 휩싸인 시기에, 창의병(처음 1백명, 나중에 6천명)을 일으켜 안으로 반적 국경인 국세필 정말수 등을 목 베고, 밖으로 경성전투를 시작으로 길주 장평 쌍포 단천 백탑교 등에서 6대첩을 거두어 왜병 천여명을 베어 함경남북도 천리 땅을 수복하고, 여진족을 토벌 순무하여 국경 6진을 공고히 하였다. 임란후 그는 중앙의 당쟁을 피하여 주로 길주목사를 비롯하여 지방 수령으로 돌다가 병조참판에 이르렀으며, 나중에 의정부 송산에 살면서 시부를 짓고 농포집 5권을 남겼다. 그는 말년에 박홍구 역모사건에 무고되어 고문을 받았지만 무죄임이 밝혀졌으나, 그가 창원부사때 지은 초회왕시가 인조를 빗댄 것이라는 모함으로 고문사 당하였으니 향년 60세였다. 사후 임란 1등공신 좌찬성 대제학으로 추증되고 충의공 시호와 부조전이 내려졌으며, 그의 공덕을 기려 함경도에 창렬사 등 네 사당에 배향되었다. 남한에는 건국후에 지은 진주 충의사와 이곳 충덕사가 있다. 또 함경도민이 세운 북관대첩비를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빼앗아가 토쿄 야스쿠니 신사에 방치되어 있다가 일본에서 되찾아 북한으로 인도되어 원소재지인 김책시 림명리에 복원하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복제비를 경복궁과 독립기념관 그리고 정문부선생 묘역에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