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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도문(黃道文)은 경기도 강화(江華)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 강화군 부내면(府內面) 읍내(邑內)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그 진행을 주도하였다. 연희전문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황도문은 3월 8일 길상면(吉祥面) 온수리(溫水里) 교회 목사 이진형(李鎭亨)의 집에서 황유부(黃有富)·유봉진(劉鳳鎭) 등을 만나,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이튿날 교회로 모이도록 연락을 취하였다. 3월 9일, 교회에는 염성오(廉成五)·유희철(劉熙哲)·장흥환(張興煥) 등 수십 명이 모였는데, 이때 조종환(趙鍾桓)이 서울에서의 독립만세 시위상황을 설명하고 강화에서도 호응해야 한다고 하자 모두 이에 찬성하였다. 황도문은 다시 황유부를 만나, 이 달 18일 읍내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이들에게 [강화군민에게]라는 권유문을 각지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3월 18일 오후 2시 읍내 장터에는 1만여 명의 시위군중이 운집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시위의 주동자였던 유봉진은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나, 황도문은 장봉도로 피신하여 등사판을 땅에 묻고 제물포에 가서 다시 선언문을 뿌렸다. 이후 황도문은 강원도 등지로 3년 동안 숨어 다니다가 강화에 돌아와 기독교 계통의 신흥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하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