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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가래비 3.1운동 순국기념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연이어 승리한 일본제국주의는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하여 한국을 반식민지로 만들고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다. 일제가 우리의 군대를 강제 해산시키자 한민족은 일제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의병전쟁을 일으켰으나 일제는 이를 잔인하게 토벌하여 진압시켰다. 일제를 우리나라로부터 축출하기 위하여 의병장인 안중근은 마침내 만주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오 히루부미를 사살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제국주의는 1910년 한국을 강제로 점령하여 조선총독부를 설치할고 데라우찌를 총독으로 임명하여 헌병 경찰에 의한 무단통치를 감행하였다. 우리 민족은 국권회복을 위하여 해외인 만주 중국 러시아의 연해주 미주 등지로 망명하였고 일부는 국내에서 악조건을 무릅쓰고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전쟁 등 여러 갈래의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전에도 국내외에서 다양한 항일투쟁이 진행되었다. 먼저 국내에서 이루어진 독립운동단체의 활동상황을 살펴보면 신민회의 105인사건 독립의군부 국권회복운동 최기중의 풍기광복단 국권회복운동 조선국민회 국권회복운동 대한광복회 국권회복운동 이관구의 국권회복운동 청림교 국권회복운동 민단조합 국권회복운동 박현대 독립단의 활동 등이 있었다. 국외에서는 미주의 해스딩스 한인소년병학교 죽국의 동재사 만주의 신흥무관학교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의 대한광복군정부, 히와이대 조선국민군단 하와이개 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 미국의 대한국민회 뉴욕 세계약소민족회의에서의 독립호소 만주에서의 무오독립선언 일본 동경에서의 2.8독립선언 신한청년단에 의한 파리평화회의에서의 독립호소 등의 활동이 펼쳐졌다. 이와같은 활동들이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한편 일제의 무단통치하에 조선인의 탄압상황은 매우 심각하였다. 1911년 하루평균 수감자가 9.500여 명이었고 1918년에는 12,000명이 넘었다. 이 수치만 보아도 일제의 탄압이 얼마나 잔인했는가를 잘 알 수 있으며 우리 민족의 고충이 말할 수 없을 정도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제국주의의 잔인한 무단정치에 굴하지 않고 국내외에서 항일운동이 전개되고 있을 무렵 미국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천명하였다.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오스트리아 제국 안에서 있던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등이 독립하였고 러시아 지배하에서 폴란드 에스토니아 폴란드 에스토니아 핀란드 리투아니아 등이 독립하였다. 이는 항일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우리 민족에게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소식이 국내에도 전파되자 일제에 대한 한민족의 저항이 절정에 달한 때에 민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