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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양주(楊州) 사람이다. 1911년 3월 일본(日本) 동경(東京) 명치(明治)대학의 법과에 유학하던 중 중국(中國) 상해(上海)에서 재망명 길에 오른 이승만(李承晩)이 동경에 체류하는 기간 동안 유학생에게 행한 강연으로 인하여 반일민족사상과 조국광복의 독립사상을 갖게 되었다. 1913년 중국 북경(北京)을 거쳐 상해로 망명하여 신규식(申圭植)·박은식(朴殷植) 등과 동제사(同濟社)를 박달학원(博達學院)으로 개조하여 혁명청년들을 훈련시키며 진영사(陳英士)·황 각(黃覺) 등과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와 아시아 민족의 반일단체로서 대동당(大同黨)을 조직하였다. 1915년 구국종교로서 민족의 대동단결과 정신적 유도를 목적으로 육성교(六聖敎)를 제창하였는데, 이는 단군(檀君)은 '독립사상(獨立思想)', 불타(佛陀)는 '자비제중(慈悲濟衆)', 공자(孔子)는 '충서일관(忠恕一貫)', 소크라테스는 '지덕합치(智德合致)', 예수 그리스도는 '애인여기(愛人如己)', 마호메트는 '신행필용(信行必勇)'으로써 연결하여 육성일체(六聖一體)를 구상한 것이었다. 1919년 2월 중국 상해에서 신규식의 밀명을 받아 일본 동경으로 파견되어 조선의 유학생들과 접촉하여 2·8독립선언의 계기를 조성하면서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을 지도하였다. 1919년 4월 10일 3·1독립운동 이후 국내 서울에서는 조선민국 임시정부(朝鮮民國臨時政府)를 수립하고 정도령(正都領)에 손병희(孫秉熙), 부도령(副都領) 및 내각총리경(內閣總理卿)에 이승만(李承晩)으로 내각을 구성할 때 그는 교통무경에 임명되었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上海)에서 신규식(申圭植)과 함께 혁명당(革命黨)을 조직하여 이사로 취임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수립하기 위한 임시헌장(臨時憲章)과 임시의정원법(臨時議政院法)을 제정하여 초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제1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이 개회됨으로 초대 국무총리에 이승만(李承晩)을 선출하고 국무원이 구성되자 국무원 비서장에 선임되었다. 1919년 4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국내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의 정보통신과 군자금 모집, 송금 및 임시정부의 선전과 독립사상의 고취를 위하여 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을 조직하게 되자 그는 외교특파원으로 임명되었으며 국내에서는 이종욱(李鍾郁)을 통하여 이병철(李秉徹)·안재홍(安在鴻)으로 하여금 조직의 활동을 하게 하였다. 1921년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열린 공산당대회(共産黨大會)를 참관한 후 중국 북경에 돌아와서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을 내용으로 하는 '만주리선언(滿洲里宣言)'을 발표하였으며, 임시의정원 경기도 의원으로 선출되고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피선되었다. 1922년 6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파리에서 열리는 국제연맹 강화회의(國際聯盟講和會議)에 김규식(金奎植)을 전권대사의 자격으로 파견하였는데 그는 김규식을 원조하는 사명을 가지고 프랑스 파리에 파견되었다. 1922년 12월 중국 상해에서 김상옥(金相玉)을 만나 재등(齋藤) 조선총독(朝鮮總督)을 죽이고, 일제의 관공서를 파괴함으로써 독립사상을 고취시킬 것을 역설하니 마침내 1923년 1월 김상옥이 국내로 들어와서 종로(鐘路) 경찰서에 투탄하는 거사를 일으키게 하였다. 1926년 8월 18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선임되었으며 학무총장을 겸임하다가 약헌개정에 따라 국무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11월 국내에서 민족유일전선으로 조직된 신간회(新幹會)의 활동과 때를 맞추어 중국 상해에서 한국유일독립당(韓國唯一獨立黨) 촉성회를 이동녕(李東寧)·안창호(安昌浩)·홍 진(洪震)·이시영(李始榮)·김 구(金九) 등과 함께 결성하고 상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창당발기인인 이동녕·김 구·이시영 등과 함께 참여하여 정치균등·경제균등·교육균등의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창시하고 당헌(黨憲)·당강(黨綱)을 기초하여 가결시켰다. 1930년 7월에는 국무위원장 이동녕과 함께 국무위원 외무장으로 임명되었다. 1931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치적 공작을 목적으로 특무대(特務隊)를 조직하여 의생단(義生團)이라 하고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공작 일체를 김 구에게 위임한 후 애국단(愛國團)의 명칭으로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의 대의거를 일으키게 하였다. 1933년 1월 임시의정원에서 국무위원에 선임되어 임시정부 내무장(內務長)에 취임하였다가 그해 3월 6일 해임되고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되었다. 1933년 7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합당파(合黨派)간에 통합하고자 하는 논의가 결의되어 새로운 민족단일당으로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이 창당될 때 한국독립당을 해체하고 합당파를 이끌고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였다가 조선의열단의 김원봉(金元鳳)이 당권을 장악하자 1933년 9월경에 민족혁명당을 탈퇴하여 다시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다. 1934년 3월 일제가 1932년 1월 중국 상해에서 침략전쟁을 일으키고 전승하게 됨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당시 전사한 일본군 장병들의 초혼제(招魂祭)를 거행하게 된다는 정보를 입수한 강병학(康秉鶴)이 식장에 참여하는 유길(有吉) 상해일본공사와 금촌(今村) 제3함대사령관 등 일본 요인들을 폭탄을 던져 죽이고자 의거를 일으키자 그 의거에 대한 선언서를 작성하여 중국국민과 내외동포에게 독립사상을 널리 선전하였다. 1935년 항주(杭州)에 이전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 외무장에 재선되었다. 1936년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내무장으로 선임되었으며 3·1독립운동 제17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한국독립당의 명의로 된 기념선언을 발표하였다. 1937년 8월 중·일전쟁(中日戰爭) 발발을 계기로 광복전선을 구성하기 위하여 김 구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과 이청천(李靑天)의 조선혁명당과 제휴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를 중국 남경(南京)에서 결성하고 '대중전국선언(對中戰局宣言)'을 발표하였다. 1939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어 외무장으로 임명되었다. 1940년 4월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재건파 등 3당이 통합되어 한국독립당을 창립할 때 중앙집행위원에 피선되고 창당 선언을 기초하여 한국독립당은 3??독립운동의 생명을 계승한 민족운동의 중심적이고 대표적인 당임을 성명하였으며 동년 9월 17일에는 중국 중경(重慶)에서 광복군총사령부(光復軍總司令部)를 설립케 하여 전례식을 거행하고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1941년 중국참정회(中國參政會)에 교섭하여 한국독립에 대한 원조와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였으며 1942년 1월 임정선전위원회(臨政宣傳委員會) 주임위원이 되어 선전계획의 수립과 전개의 중추적 활동을 하며 '고 국내동포서(告國內同胞書)'를 작성하여 발표하였다. 1942년 3월 임시정부의 외교부장으로서 미·영·소·중 4개 연합국에 대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속히 승인하여 줌으로써 연합국과 함께 일본을 공격할 수 있음을 천명하고, 한편 동년 10월 11일에는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를 성립시켜 협회장에 손과(孫科) 중국 입법원장이 되고 그는 김규식과 함께 한국측의 부회장으로서 선임되어 중한공동전선 강화에 이바지하였다. 1943년 6월 임시정부 외교부장의 명의로 중국 국민정부(國民政府) 군사위원장에 장개석(蔣介石) 총통에게 공한을 보내어 동년 7월 26일 김 구 주석과 김규식 선전부장, 그리고 이청천(李靑天) 광복군사령관과 함께 회담하게 되었으며, 이 석상에서 한국의 독립지원을 요청한 결과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 한국독립문제가 논의되고 독립의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1944년 3월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한국독립당의 임무〉라는 제목하의 논설을 발표하고 동년 6월에는 임시정부 외무부의 비망록을 작성하여 발표함으로 중·한 양정부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9월에는 중한문화협회에서 외교정책에 관한 연설을 행하여 내외의 이목을 끌고 우방의 여러 나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촉구하였다. 1945년 2월 28일 임시정부 외무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당시 임시정부에서는 임시의정원에 대하여 대독선전 동의요구안(對獨宣戰同意要求案)을 제안하여 만장일치로 결의하게 되어 임시정부에서는 독일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게 되었으며 동년 3월 5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개최되는 연합국회의(聯合國會議)에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가 참석할 수 있도록 정식요청하고 재미교포인 윤병구(尹炳球)외 8명을 선임하였다. 광복후에는 한독당 부위원장·사회당 당수·국회의원 등으로 활약하다가 6·25 당시 북한에 납치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8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