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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공의 17대조이다. 아버님은 휘 기정이요 어머님은 당악 김씨 광도의 따님으로 포덕 22년 서기 1881년 안주 송성리 본가에서 태어나니 어릴 적부터 총명이 과인하여 가문의 촉망을 받았고 19세에 동학에 입당하여 인내천의 사상과 사인여천의 윤리를 실천하면서 용화면 울담리에 교당 겸 서숙을 건립하여 포덕과 교육에 심혈을 쏟으니 따르는 사람이 구름 같았다. 포덕 45년 갑진 개화운동에 앞장서서 항일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하였고 경술국치를 당하매 비분강개하여 설교와 강연으로 국권회복을 역설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여러 동지들과 치밀한 계획을 세워 3월 3일 안주 율산공원에 5천의 군중을 모아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헌병대를 포위하였는데 그들이 발포로 많은 사상자를 내었고 공도 결국 체포되어 2년 반의 형을 복역하였다. 출옥 후에도 교당을 지키면서 포덕과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포덕 85년 4월 징병되어 나가는 교인 자제 13명에게 일본의 패망과 조국광복이 눈 앞에 다가왔음을 강조한 일로 다시 헌병대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 끝에 8개월 징역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몽매에도 그리던 민족해방을 수개월 앞두고 포덕 86년 1월 9일 향년 65세로 옥사 순국하니 묘소는 신안주면 용운리 앞산이다. 배위는 해주김씨 경서의 따님인데 부덕모의를 갖추어 포교와 치산과 자녀교도에 정성을 다하다가 공보다 10년 앞서 포덕 76년에 별세하였고 묘소는 공 묘 옆산이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으니 남에 관성 관석 관명이요 녀서는 선산 길용중 경주 최광수이며 관성의 자에 원철이요 관석의 자에 원도 원교이다. 관성은 6.25사변에 남하하여 근검절약으로 정재를 모아 동천고등학교와 부산예술전문대학을 설립하여 공의 유지를 받들고 있고 그 밖의 자손들도 모두 나라와 천도교를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