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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하며 광주학생운동의 선양을 통한 도민들의 애국정신을 진작하는 등 세가지 방침으로 일하였다. 선생은 몸소 검약을 수범하며 일말의 부정이라도 적발되는 공무원은 상하를 불문코 추상같이 문책했다. 1954년에는 광주서중 앞뜰에 광주학생운동기념탑을 세우고 광주학생운동 당시 제적되었던 희생자들을 복적시키니 이들의 항일의 기백으로 새나라 젊은이들의 정신적 기둥을 삼자는 선생의 간절한 뜻이었다. 그러나 휴전 후 점차 누적되는 자유당 정권의 비정으로 이같은 선생의 목민관으로서의 열망은 꺾이기 일쑤였으니 세 번 사의를 표하다가 1955년 2월 마침내 관직을 스스로 떠남으써 건국 초기의 청백리로 이도의 사표를 세웠다. 부인 김흥순 여사는 1907년 9월 13일생으로 청도인 김자현 선생과 김부이 여사의 장녀로 동래일신여학교를 나왔으며 경석 휘석 두 아들과 양자 양수 양옥 세 딸을 두었다. 경석은 동래인 정수자와 결혼 승우 재연 희정 휘석은 김해인 김영인과 결혼 종우 정현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