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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4일 서울에서 연락책인 김법린과 김상헌이 범어사로 내려와 승려들과 청련암에서 시위를 계획하였다. 3월 6일 오후 범어사에서 선언식을 거행한 후, 3월 7일 동래 장날에 맞춰 30여 명이 시장 중앙에서 선언서를 배포하고 함께 만세를 부르며 경찰서로 돌진하였다. 이 시위에 참여자들은 대부분 체포되었다. 3월 17일 범어사 명정학교 및 지방학림 졸업생 송별회 모임에서 18일 새벽 동래시장 인근 불교포교당(현 동래구청 내로 추정)으로 집결하기로 계획하였으나 밀고로 실패하였다. 18일 밤 40여명의 범어사 학생들이 동래읍성 서문에서 남문으로 이르기까지 만세시위를 하고 자진해산하였다. 또 19일에는 범어사 학생들이 3차례에 걸쳐 만세시위를 전개한 후 경찰에 체포되었다. 동래고보에서도 3월 초 부산상업학교 대표와 서울학생대표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김귀룡·고영건·엄진영 등이 거사를 도모하였고, 3월 10일 경성고등공업 전문학교에 다니던 곽상훈이 독립선언서를 들고 동래고보 교사 이환을 찾아가 전달하면서 더 계획적으로 진행되어 3월 13일 동래 장날 망미루와 동래읍성 남문 부근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여, 시위참여자 대부분이 체포되었다. 1919년 당시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구 하나은행 동래지점에서 복산동주민센터까지 570m를 동래구에서 만세거리로 지정하고, 1996년부터 매년 3월 1일 독립만세 재현행사를 개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