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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3.1독립운동 약사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민족대표가 우리의 자주독립을 온 천하에 선언하자 부산 각처에서도 격렬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3월 11일 밤 일신여학교 학생이 좌천동 거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니 수많은 시민들이 합세하였다. 이 의거는 부산지방 3.1독립운동의 첫 봉화가 되었다. 3월 13일 동래 장날 동래고등보통학교 학생이 중심이 된 수천 민중의 봉기가 있었으며 3월 18일과 19일 동래 시장의 시위에는 범어사의 명정학교와 지방학립 학생과 군중이 합류하여 시위를 벌였다. 3월 29일 구포 장날 대형 태극기와 현수막을 앞세운 수많은 군중의 대규모 집회와 경찰 파출소 습격이 있었고 4월 5일 기장읍 장날 1천여명이 궐기하였으며 잇달아 장안면과 일광면 정관면에서도 농민과 장꾼이 합세한 가두 시위가 있었다. 4월 10일 명지의 동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다음날까지 이어졌으며 이 밖에도 부산상업학교 부산진보통학교 영도옥성학교 학생들의 구국거사와 의열청년들의 열차 투석 전차 운전자들과 철도직공들의 항일동맹파업 및 시민들의 항쟁이 5월까지 끊이지 않았다. 당시 부산 각 지역의 독립투쟁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된 인원은 2백명이 넘었고 실형선고를 받은 사람은 1백50명에 이르렀으며 이같은 민족투지는 조국독립의 밑바탕이 되었다. 1996년 3월 1일 이태길 최해군 짓고 조영조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