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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년 3월 1일 오후 2시 30분 손병희 선생을 비롯 32인의 민족대표가 서울 태화관에 모였다. 독립선언식이 거행된 이후 이곳 귀래리 마을 사람들도 이틀간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4월 7일은 본마을 평촌사람만 백여 명이 모였고 8일은 귀래리, 평촌, 고청, 새동말 등 약 2백여명의 여러 고을 민초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스스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만세운동의 추진은 천도교인인 김현수 김현홍 선비 서상균 서당훈장 이정년 등의 독립지사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민초들은 망곡례를 지내던 마을 앞 언덕에 모여 천막을 치고 본부석을 만들어 자랑스러운 겨레의 상징인 태극기를 높이 세웠다. 또한 군중 앞에서 김현수 독립지사는 독립의지를 굳건히 하는 강연을 했다. 강연이 끝난 뒤 마을 사람들 모두는 강연한 응집력으로 한마음 한뜻이 되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염원을 만세소리에 담아 독립만세를 외쳤다. 특히 서상균(일명 병균) 독립지사는 "일본놈에게 잡혀가기보다 죽는 것이 좋다"며 칼로 자신의 목을 몇 번이고 찔러 벙어리가 되었다. 그리고 목에 통고무호스를 달고 한 많은 여생을 마감하였다. 이러한 선조들의 정신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늦게나마 그 숭고한 뜻을 기려 후손들에게 조상의 얼을 전하고자 이 기념비를 면민의 뜻을 담아 원주시장의 지원을 받아 세우다. 일천구백구십육년 팔월 십오일 박찬언 글 짓고 이선균 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