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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일본 동경에서 기독청년회 회원으로 있으면서 3 1독립운동시 임규 심영택 등과 독립선언서를 유인하여 각계에 배포하는 등 활약하다가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동년 4월 13일 초대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며, 이어 임시정부 법무부 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0년초 귀국하여 중앙학교에 근무하다가 동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하였으며, 1921년 11월부터 편집기자, 1924년 12월부터 1925년 3월까지는 편집국장 대리로 민족언론 창달에 전념하였다. 한편 동아일보에 근무하면서 1920년 7월에는 조선청년회연합기성회를 조직하고 오상근을 위원장으로 추대하였으며, 그는 서무를 담당하여 청년운동을 벌였다. 1921년 3월에는 조선노동공제회 정기총회에서 61인의 대표자 중 한사람으로 뽑히기도 하였다. 1925년 동아일보에서 나온 그는 시대일보 편집국장을 지냈으며, 동년 10월에는 민족의 자립자활을 목표로 하는 조선물산장려회 이사회에서 선전부 이사로 선출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는 바, 이 회에서는 1927년 2월 13일 기관지 "자활"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1926년 3월에는 교육이 민족을 살리는 가장 효과적인 사업이라고 판단하고 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여 이종린 박승철 최원순 안재홍 등과 함께 대학 건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초에는 민족단일과 민족협동을 표방하며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망라한 민족유일전선으로 신간회가 창립되었는데, 그는 동년 2월 15일 YMCA에서 안재홍 신석우 김준연 이상재 홍명희 문일평 한용운 등과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그 중앙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31년 5월 이 회가 해체될 때까지 구국운동을 벌였다. 1928년부터 1932년 4월까지는 조선일보사 편집국장으로 언론을 통한 민족계몽을 위해서 노력하였으며, 1935년부터는 다시 중앙고보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1941년 6월 20일 학교 사택에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