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page


31page

에서 신덕영 조형규 등과 부한청년회를 조직한 후 농림주식회사의 주식 모집원으로 가장하고 전남의 담양 곡성 등 각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임시정부로 보냈는데 이해 11월 5일에 동지 노기준 등과 함께 왜경에게 체포되어 다음해 5월 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26년에 출감하였다. 이후 선생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산서성 대원부에서 안창남 신덕영 김정연 이용필 등과 공명단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었는데 1927년에 북만주에 독립군 비행학교를 설립하기로 계획하고 그 기금모집과 공명단 지부 설치를 목적으로 1929년 4월에 서울에 잠입하였다. 선생은 동지 김정연 이선구와 함께 동월 20일 서울 근교 망우리에서 춘천으로 왕래하는 일제 우편수송차 등을 권총으로 습격하여 왜인의 우편물을 소각하고 많은 금품을 압수한 후 천마산으로 종적을 감추었다. 이 급보를 받은 일제는 경기 강원 황해 충북 충남 5도의 경찰과 왜군 19사단 병력을 동원하여 처마산을 포위하니 선생 일행은 이들을 상대로 망우리고개와 마치고개를 넘나들며 1주야를 악전고투하였으나 탄환이 떨어지고 기진맥진하여 왜경에게 체포되었다. 그후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을 거쳐 9월 20일 선생은 10년, 김정연은 8년, 이선구는 5년의 징역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는데 이선구는 옥중에서 병사하고 선생은 만기 출옥하였다. 광복 후 선생은 서울형무소 서무과장으로 근무하다가 승진하여 인천형무소장으로 근무한 후 퇴직하였고 1983년 음력 5월 4일에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구국활동에 대하여 1962년 3월 1일에 건국공로훈장 단장